비평, 숨겨진 뜻(含意) 아닌 숨겨진 적대를 찾아야 한다

아마도 <국제시장>의 내러티브를 조형하는 공정은 이랬을 것이다. 모든 영화가 그렇듯 물론 <국제시장>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영화가 아니다.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를 만들고 싶다는 윤제균 감독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고, 그래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훑기 위해 한 세대의 ‘남성'이 정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여지없이 그 세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의 기억이 재구성한 사건들을 통해 그의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좋든 싫든 자연스럽게,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어떤 시선이 투영되어있다. 우리는 상처로 얼룩진, 아버지들의 대표주자 덕수의 회고를 통해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격정적 시간을 돌아본다.

신파

신파 멜로는 우리나라 영화관객들에게 사랑받는 형식이다. 지극히 장르적인 문법 속에서 서민적인 유머가 버무려진 캐릭터의 고군분투를 통해 해피엔딩으로 점철되는 대중영화를 만들어온 윤제균 감독이 ‘신파'를 만났으니 그 진가를 발휘할만 하다. 나는 <두사부일체>나 <1번가의 기적>, <해운대> 같은 영화들 속에서 등장하는 밑바닥 인물들이 거치는 험난한 현실의 고군분투와 무한 긍정의 에너지가 다분히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구멍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고유한 장점을 갖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벅찬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영화를 더 좋아하는데, 윤제균은 사회적으로 억압된 자들의 삶에 대해 다루면서도 그것에 판타지를 덧씌움으로써 불편한 진실을 소멸시킨다.

결국 문제는 신파가 현실을 망각하게 하느냐, 혹은 위로하느냐다. <국제시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파적이고 결말에 가서는 덕수 세대가 겪은 고단한 과거에 대한 위로를 통해 굴곡진 현대사를 통째로 긍정한다. 바로 여기서 논란의 포인트가 생기는데, 아무래도 이런 긍정이 그리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국제시장>의 신파가 현실을 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왜곡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속에서는 한 가장의 헌신적이고 용기있는 삶의 장면들로 지나가는 파독 광부나 베트남 전쟁 파병이 감추고 있는 진실은 이보다 더 참혹했다거나, 피난가려는 한국인들을 살려준 좋은 모습으로 비춰지는 미군은 다른 한 쪽에서는 무고한 양민들을 무더기로,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도 한 가해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론가들이 영화에 담긴 이데올로기적인 함의,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발생하는 ‘숨은 뜻’에 대해 해석하고 표지하는 것이 과연 그 영화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까? 별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TV조선' 같은 극우 언론이 눈에 불을 켜고 판에 뛰어든 이상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리 영리한 선택도 아니다. 오히려 극우주의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판을 키우고 “항상 가르치려 들고 깨끗한 척하는 위선자들”에 다름 아닌 ‘진보' 혹은 ‘평론가'에 대한 이미지를 심화시킬 뿐이다.

위로

<국제시장>이 성기고 작위적인 짜임새에도 불구하고 주목받고 흥행가도를 달리는 것은 이 영화가 5,60대와 3,40대로 양분되어 드러나는 한국사회의 주요한 갈등을 드러내고, 또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험난한 세월을 숨가쁘게 보내며 무수한 내상을 입은 윗 세대 대다수는 덕수가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과 달리 여전히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노인층의 자살이나 빈곤의 문제는 그들이 그토록 힘겨운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우울한 지표다. 덕수가 손녀의 노래에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오늘날 노인 대다수는 누구로부터도 위로받은 적 없다. 정권을 쥐고 빈곤의 문제를 방치하고 있는 정치세력이 취하는 탁월한 제스추어 덕에 ‘위로받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을 뿐이다.

덕수처럼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런 영화를 통해 철 없는 젊은 세대가 부디 깨닫길 바랄 것이다. 세상 살이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이 나라를 이렇게 키워놓았는지. 요컨대 영화 속에서 현재 장면에 등장하는 몇몇 젊은이들이야말로 오늘날 그 세대가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모습일 게다. 툭하면 “이제 그만 그딴 돈도 안 되는 가게는 팔아버리시라" 말하는 아들이나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어서 재개발 동의서에 도장 찍고 나가시라" 종용하고 협박하는 업자들 말이다. 그런 형상으로 재현되는 젊은 세대에게 어찌 나라를 맡긴단 말인가. 광부로 간호사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버티고 전쟁터와 공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켜온 나라인데 말이다.

확전

문제는 항상 이 구도를 양산하고 끊임없는 확전을 통해 효과를 누리고 있는 ‘숨은 조종자'들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보수양당 정치시스템에 기생하는 모든 권력자들이다. 한국사회를 뼈 빠지게 노동하며 가난하게 살아온 평범한 이들을 위한 사회가 아니라, 재벌과 투기자들에게 유리한 사회로 만들어왔다. 그들의 관심은 언제나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어떻게 연장시키느냐에 달려있었지 덕수처럼 헌신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온 이들의 노동의 권리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달러를 위해 전쟁터나 사지로 노예처럼 팔아넘겼지만 공돌이 공순이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IMF 외환위기는 권력자들과 재벌이 아닌 근검절약하고 땀흘려 일하지 않은 국민의 탓으로 돌려졌다. 재벌 자본은 구제되어도 노동자들은 무수히 잘려나가고 비정규직이 되었다.

오늘날 10,20대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란 그렇게 피폐화되고 아무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세계다. 정치적 우세를 확인한 정치인들은 뻔뻔하게도 이제 이런 고통 쯤은 감내할 줄도 알면서 살아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열악한 노동일랑 불평말고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라”고 훈계도 할 줄 안다. 심지어 일본의 니트족까지 끄집어와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미래에 대한 공연한 ‘희망’을 품지 않아서 ‘지금' 행복한 그들에게 뭐든 배워야 할 것이라 쐬기를 박는다.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랑 관두고 모두가 비정규직이 되고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진 사회에서 욕망 없는 삶을 살라는 것이 그들이 하고싶은 말일 게다.

숨은 조종자들은 덕수 세대가 품었던 분노를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것에 성공하고 있다. 일베는 그것의 훌륭한 매개가 되었고, 그들은 덕수와는 달리 지독한 냉소주의자, 허무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적대를 폭력적으로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국제시장>의 멀티플렉스 앞 장면이 바로 그 씁쓸한 풍경을 다룬다. 덕수는 이주노동자, 피부색과 고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상식적인 적대를 드러내는 고등학생들을 꾸중하는데 이는 윤제균의 영화가 드러내왔던 사해동포주의적인 휴머니즘의 단면이다. 그의 영화 속 주변 인물들은 아예 사악하거나, 아니면 대부분 심성이 착하고 단층적이다.

그럼에도 극우주의자들이 <국제시장>의 흥행가도를 즐기고 이것을 전장으로 만드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지난 현대사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과 낙관이 진보주의자들, 좌파평론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덕수의 역사에는 독재에 맞선 대중들의 투쟁이나 5월 광주, 87년 6월 투쟁 따위가 누락되어있다. 이보다 좋은 먹잇감이 어딨겠는가. 노년의 고독과 회한이 가득한 덕수를 통해 정치적인 정당성을 재확인받고, 역사적인 ‘승인'을 요구하기 마련인 것이다.

정말로 삶이 좀 나아졌는가

오늘날 비평은 거의 명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대중적인 범주로 지탱되고 있던 영화 비평 역시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네이버 평점을 통해 저마다의 평론을 남기며 영화를 평가하게 된 사람들은 요즘 평론가들이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 한심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한다. 평론가들이 보다 대중적인 언어로 공론장에 나설 필요도 있겠지만 대중의 반지성주의적 분노도 한 몫 한다. 진중권 같은 평론가들은 이런 반지성주의에 대적하겠다는 심산으로 짐짓 가르치는 자의 포지션에 서서 독설들을 내뱉기도 하고, 지적 우위에 서서 냉소하는 자의 제스쳐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지성주의 대중이데올로기는 그런 ‘훈계'로 교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악화시키고 배양할 뿐이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고 작동되는 이 거대한 괴물을 지독하게 외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대중이데올로기의 상태에 대해 냉정하게 직시하는게 필수일테고, 더불어 그 공간에서 유의미하게 개입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가 덕수세대가 그토록 고생하고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지켜온 이 사회가, 정말 다음 세대인 우리들에게도 살만한 세상이 되었는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현실이다. 항상 개고생하는 이들의 삶이 매스미디어라는 전장에서 벌어지는 말들의 잔치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것, 그래서 보다 계급적으로 응시하고 진짜로 우리 삶을 이렇게 끊임없이 추락시키고 정체시키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멈추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누구를 심판해야 하는가? 실력도 없는 주제에 이런저런 소릴 늘어놓으며 잘난척하는 빨갱이인가, 언제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온 우리들, 수많은 덕수들을 이 고통의 늪에 빠뜨린 책임자들인가. 우리에겐 위로 혹은 제대로 전달된 적대가 필요하다. 충분히 위로받아야 상처도 보듬을 수 있고, 엉뚱한 상대가 아닌 숨어있는 시스템을 대상으로 해야 피아식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많은 덕수들은 행복해졌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오늘도 담뱃값, 소주값을 미끼로 정체모를 극우집회 알바도 끌려나가야 하고, 온갖 사기꾼들에게 속지 않고 버티기 힘든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이제 우리가, “왜 고통이란 것은 다시 우리에게 떠넘겨졌는가"에 대해 되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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