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9일 한 정당이 법리적으로 용납하기 불가능한 말장난에 의해 해산되었다. 어제와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었다. ‘멘붕’에 빠지거나 대체 이런 나라에 어떤 희망이 있는 것이냐며 겁에 질리기도 했고, 슬픔에 잠기거나 분노하기도 했으며, 혹은 쾌재를 부르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선고 당일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박근혜 대통령은 다음 날 통합진보당 해산이 “자유민주주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었다고 말을 보탰다. 이로써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구성된 그것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것임이 분명해졌다.

지배세력은 이른바 ‘종북’에 대한 ‘대중적인 혐오’를 바탕으로 ‘민주주의’ 없는 자유민주주의를 세웠고, 자신의 통치 위기 국면에서도 빠져나갔다. 청와대 정윤회 문건 파문으로 위기에 빠진 정권의 ‘출구전략’은 모두의 예측보다 큰 것을 내주는 것이 될 게 분명하다. 헌법재판소는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동시에 스스로 헌법을 파괴하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진보정당운동이 ‘운동 없는’ 진보정당으로 거듭났듯, 헌재 역시 ‘헌법 없는’ 헌법재판소로 거듭난 것이다.

▲ 20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한국진보연대 주최로 열린 ‘민주수호 국민대회’에 참석한 시민들. (사진=연합뉴스)

민주주의는 이미 죽어있었다

“파국을 진리의 원천으로 비극적으로 갈망해서는 안 된다.”(프랑코 모레티, 조형준 역, <공포의 변증법>) 통진당 해산 선고 이후 횡행하는 ‘민주주의 사망' 선언들을 보며 떠오른 문구다. 우리는 마치 그런 선언이 민주주의에 대한 폭넓은 대오 각성을 불러일으키기라도 할 것처럼 기대하며 남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민주주의는 죽었다”며 장엄하게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뜻하고자 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바 아니나, 나는 그런 선언이 아무 의미­효과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이미 죽어있었고, 우리는 죽은 민주주의의 장례를 제대로 치루지 못한 채 공염불을 외는 상황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젠가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 민주화가 되지 않았다”며 ‘경제민주화론’ 따위를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으로 형성된 87년 체제의 역사적 효과를 스스로 와해시키고 고통분담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추락시켰던 순간부터, “박근혜나 새누리당을 찍은 무식한 가난뱅이들 때문에 이 나라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가 없어!”라며 정치적 반대파들에 대한 분노를 몫 없는 자들에게 쏟아내던 순간부터 민주주의는 죽어있었다.

그렇다면 항상 ‘민주주의’라는 것 앞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자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 세계를 살고 있는가? 세상이 우리에게 “너는 자유로워.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로웠던 적 없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돈 있는 자들만의 자유, 소유의 자유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자유롭게 삶의 피난처나 경로를 선택할 자유가 있는가? 도시 어딘가로 이동하고 거주할 자유는? 달이 뜬 밤이나 주말에 쉴 자유는? 차가운 겨울에 따뜻한 오리털파카를 입을 자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자유는 주어진 적 없다. 고작해야 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읽을 때만큼은 제멋대로 험악한 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자유 정도가 헐값에 주어졌을 뿐이다. 그것은 조직되지 않은 무수한 중소·영세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청소년들이나, 조선족이주민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누가 자유롭다고 말했으며, 87년 체제가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말해왔는가? 오히려 우리는 평등하고도 자유로운 고유의 권리를 누리는 ‘시민’이기보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노예에 가깝다.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자유가 제거된 상황에서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다수 대중, 노동자들이 자유롭지 않은 사회는 조금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조롱의 대상으로서의 ‘정치’

사람들은 더 이상 민주주의라는 기표에서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자유’, 우리가 사상의 자유나 인권,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따위에 대해 말할 때의 그 ‘자유’를 떠올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대중들에게 민주주의란 어떤 보편성, 꼭 지켜야할 진리 없이 그저 이리저리 나뉜 세상의 조각들을 적절하게 배열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정치란 그저 각박해지는 서민의 삶들을 보위하는 대신 신문지면을 차지하는 성가신 말다툼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조각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임’일 뿐이며, 청렴하고 공정하게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감시’하는 전문가들의 도덕 혹은 부도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런 효율적이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벗어나 성가신 말장난 같은 것은 짜증을 유발하거나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우리가 흔히 ‘민주파’라고 이야기하는 정의로운 신자유주의자들과 악랄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공모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아주 협소한 의미에서 정의하는 흐름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정치적인 것을 후퇴시켜온 ‘진보주의자’들 역시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IMF 이래 두 차례씩 수권했던 양대 정당은 항상 ‘개혁’ 혹은 ‘안정’을 운운 하며 비정규직을 양산해왔고, ‘선진화’나 ‘유연성 강화’ 따위를 말하면서 정리해고제를 도입했다.

당연히 아래로부터 삶은 파괴되기 시작했고, 그 사이 이뤄진 ‘민주주의’라는 텅 빈 기표를 둘러싼 양자의 악다구니들에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의 조건이 파괴되고 있는데 ‘그따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해 해산을 명령한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운니동 재동로터리에서 열린 청년 보수단체 기자회견에서 회원들이 통진당 해산을 환영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왜 그것이 출현했는가’ 근본적으로 물어야

“헌재의 판결은 민주주의 사망 선고”, “민주주의는 오늘 죽었다!” 혹은 “헌재의 판결은 민주주의의 승리” 모두가 민주주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텅 빈 기표 사이에 공회전하며 추락하는 ‘정치’의 문제이며, 그것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스스로의 대상을 갖게 하는 ‘경제’(이를테면 극심한 불황기의 추락하는 삶)의 문제다.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추락했을까? 사람들의 삶은 무너지고 있는데 왜 폭발적인 저항은 일어나지 않는가? 대중은 왜 냉소하며, 진보정치는 왜 외면을 받는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했는가? 왜 일베가 출현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도덕적 결함이니 콘텐츠, 싸가지 따위의 현상학적인 수사 말고 총체적인 ‘응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길을 제시하고 항로를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는 ‘종북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매스미디어 앞에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항변’이 진보정치에 대한 대중의 오해를 해소하고, 나아가 새로운 ‘정치’를 형성하는 대중운동을 형성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런 고백들은 정치의 왜곡된 방향을 유지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혁명 같은 그런 낙후된 생각을 아직도 갖고 있다니! 대중들이 얼마나 세련된 걸 원하는데! 스웨덴 복지국가 좋잖아!” 얼마 전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노회찬이 했던 말도 이와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강요된 각서에 서명함으로써 블랙리스트에서 임시대피하는 게 아니라 오늘날 정치의 언로를 왜곡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북한’이라는 대상에 대해 계급적이고 평화운동적인 관점에서 비판하고, 주체적인 시각에서 노선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의 ‘종북주의 비판’에는 이런 분석과 비판의 과정이 누락되어 있다. 저들이 저렇게 까지 할 수 있는 것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거기엔 다양한 모순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모순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응시하며, 어떻게 해야 다시 출발할 수 있을지 ‘정치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1960년 10월 일본사회당 당수인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극우 청년인 야마구치 오토야에 의해 살해된 사건에 충격을 받아 이 소년을 모델로 〈세븐틴(セヴンティ­ン)>이라는 소설을 썼다. 그의 질문은 열일곱의 그 소년이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가에서 시작되었다. 요컨대 우리를 둘러싼 주체의 위기, 정치의 위기 역시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그들을 ‘악’으로 설정하는 것으로는 ‘정치’가 소멸된 이전투구, ‘운동’이 제거된 악다구니의 무한반복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주체가 소멸되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차라리 완전히 ‘그들’, 이를테면 끊임없이 사회로부터 소외받으면서도 습관적으로 ‘일베’에 출입하는, 여느 흔한 청소년의 입장이 되어,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그가 목도하고 있을 이 분열증적인 상황을 훑어보는 게 백번 나을 것이다. 당연히도 ‘자유’를 소거당한 그는 왜 자신이 처한 억압들에 대한 분노를 엉뚱한 곳에 풀고 있는가. 엉킨 실타래는 어디에서부터 꼬인 것인가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할일들을 다시 찾고 흩어진 조각들을 새롭게 맞춰 나가야 한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권력, 몰락하는 사회의 진정한 희망은 그렇게 정치를 되살리는 것으로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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