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현옥] 우수(雨水)가 지나니 겨울이 남긴 흔적과 기억들이 봄눈처럼 녹고 있다. 한 번만 더 비가 내린다면 자연에 남겨진 지난 계절의 흔적들은 빗물을 따라 땅속 깊이 스며들 것이다. 자연이 만든 생명이 새로운 생명을 위한 밑거름으로 돌아가야 하는 겸허한 시간이다. 물론 이 겸허한 움직임은 가을부터 부단히 계속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봄을 맞기 위해 지금은 지금대로 해야 할 자연의 숙제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무한한 생명 탄생의 계절이 올 수 있으리라. 봄의 전주곡처럼 앞서오는 꽃샘바람도 그런 의미에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공원 입구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볕이 따사롭다. 늘 같은 태양일 터인데, 세상을 향한 햇살은 어찌 그리 섬세하고 때마다 다른지. 눈을 감고도 봄이 옆 동네까지 왔음이 느껴진다. 공원 한편에서 무리 지어 뛰노는 강아지들도 마냥 즐겁다. 그들도 밖에서 서로 어울리며 다가오는 봄 향기를 맡고 있나 보다.

해가 바뀐 지 거의 두 달이 되어가는데 나는 이제야 봄과 함께 새해를 실감한다. 사람이 이리 게을러도 되는가 싶지만, 시간의 흐름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나이를 늦추고 싶었나 보다. 울타리처럼 화단을 둘러싼 마른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리며, ‘나도 그래요’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남천(南天) (사진=조현옥)

그 옆을 보니 남천(南天)이 다소곳이 붉은 잎을 펼치고 있다. 초여름 싱그러움을 뽐내던 잎들이 한여름에 접어들며 선홍색으로, 자줏빛으로 성숙해가며 물드는 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식물이다. 늦겨울을 지나 봄이 목전에 와 있는데도 붉은 잎은 여전히 단아한 모습이다.

남천은 가늘고 꼿꼿한 줄기가 옆으로 뻗어 잎이 겹치지 않고 햇살을 나누며 서로가 거리를 두고 존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위쪽에 난 잎이 아래쪽 난 잎의 빛을 가리거나 탐내지 않는다. 더 똑똑하다고, 더 가졌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고 배려하는 사람의 모습 같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나이 들어도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것처럼 한겨울을 지내고도 남천이 오래도록 단정한 아름다운 모습을 지키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나이가 들어도 품위를 잃지 않은 양반집 마님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산길을 걸으며 꽃을 만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며 꽃을 보기 위해 길을 걷기도 했다. 그 시간 속에 오랜 친구처럼 사계절을 함께해준 것이 바로 남천이었다. 하얀 꽃송이가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에 작은 기쁨의 꽃송이가 피어났다.

위에서 보면 팔각형 모양으로 펼쳐진 초록 잎에 여름비가 내린 모습은 대기를 정화하는 자연의 선물이었다. 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초록색과 붉은색의 오묘한 빛깔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고 설렘을 주더니, 날씨가 쌀쌀해진 늦가을에도 곧게 펼친 가지에 매달린 작고 탐스런 붉은 열매는 풍성한 기쁨을 주었다. 그 붉은 열매는 한겨울 흰 눈 위에서 더욱 빛났다.

남천은 차가운 겨울에도 우리 가까이에서 기쁨과 희망을 잊지 않게 해주는 식물이고 나에게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남천의 꽃말은 ‘전화위복’이라고 한다.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붉은색이 나쁜 기운을 쫓는다고 여겼다. 남천의 붉은 잎과 열매가 나쁜 기운을 쫓아내고 좋은 기운을 불러온다고 생각하여 신년 행사에서 꽃꽂이도 하고 경계 목으로 심었다고 한다.

남천(南天) (사진=조현옥)

블로그 ‘박대문의 야생초 이야기’에 따르면 남천(南天)은 남쪽 하늘이라는 이름처럼 따뜻한 중국의 남쪽지방 일대와 인도가 원산지라고 한다. 남천촉(南天燭) 또는 남천죽(南天竹)이라고도 하는데, 남천의 잎줄기에 마디가 있고 꼿꼿하게 옆으로 펼쳐진 모습이 대나무와도 비슷하여 생긴 이름인가 보다.

문득 남천이 제주 여인 김만덕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분은 물론 여성으로서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던 시대에 거상(巨商)이 되어 굶어 죽어가는 제주도민을 구하였으니, 그녀의 신념과 지혜를 따를 만한 사람이 오늘날인들 몇이나 있을까.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보람 중의 하나가 한문 문장의 뜻을 풀이하며 인성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만덕의 이야기는 가장 가르치고 싶고, 가르치며 기분 좋은 내용이다. 가난하여 기녀가 되었다가 중인 신분을 회복한 그녀의 의지도 그렇고, 거상(巨商)이 되어 힘들게 번 돈을 제주도민을 구하는 데 썼다는 이야기에 누가 감동하지 않겠는가.

고전에 나오는 어떤 덕목은 현대에 바로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김만덕의 이야기는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그 위대함에 공감한다. 정조대왕도 그녀에게 감동하여, 제주 여인은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금기까지 깨고 그녀를 도성으로 부른 것이다. 소원을 말해 보라는 왕에게 만덕은 금강산 기행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아무도 그녀가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더욱 감동한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요즘이야 좋은 장비도 많고 산꼭대기까지 안전선과 계단이 놓이기도 하지만 길도 험하고, 기껏해야 짚신이나 가죽신을 신고 조선시대 여인이 금강산을 유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큰 포부와 남다른 안목이 그녀를 거상으로 만들고 세상을 구할 수 있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남천(南天) (사진=조현옥)

만덕의 일은 지금 들어도 특별한 이야기이기에 ‘다산 정약용’ 선생도 “만덕에게는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적에 실린 몸으로 과부로 수절한 것, 많은 돈을 기꺼이 내놓은 것, 바다의 섬에 살면서 산을 좋아함이 세 가지 기특함이다. 여자로서 중동(重瞳)이고 종의 신분으로 역마(驛馬)의 부름을 받았고, 기녀로 중을 시켜 가마를 메게 하였고, 외진 섬사람으로 내전의 사랑과 선물을 받은 것이 네 가지 희귀함이다.”라고 하였다.

김만덕은 남천의 가늘고 당찬 가지처럼 꺾이지 않는 신념과 호연지기를 마음에 품었음이 분명하다. 남천은 밑에서부터 줄기가 주변으로 퍼진다고 하니 만덕이 주변 사람을 두루 살피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남천을 바라보며 김만덕을 떠올리니 노래가 절로 나온다.

바람결에 피고 지는 한 송이 꽃이 아니라네.
그녀는 백성의 추위를 막아주는 나무라네.
굶주린 백성을 먹이는 열매라네.
홀로 부유하고 고운 꽃일 수 있으나,
홀로 높아지지 않고
백성의 삶에 눈높이를 맞추고
담장 안에 재물을 쌓지 않았네.
담장 너머로 나누었다네.
담을 허물고 백성과 손잡고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네.

남천은 백일해 기침이나 강장제로 사용되지만, 독성이 있어서 많이 복용하면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준다고 하니 주의해서 복용해야 한다. 제주 사람이 찍은 남천 열매 사진을 보니, 가뭄과 기근이라는 제주의 고난 속에서 피어났던 만덕의 열매 같이 느껴진다.

최근 3년째 이어지는 감염병의 상황은 어려움도 많았고, 선한 사람들의 미담도 귀하게 피어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새봄이 오고, 전화위복의 뜻을 가진 남천잎이 푸르게 돋을 때쯤에는 사람들을 괴롭혀온 무거운 소식들이 모두 우리 곁을 떠나고, 김만덕 같은 마음을 가진 지도자가 선출되어 진정 사람들 마음에 따뜻한 희망이 솟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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