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재정정책을 놓고 논쟁이 이어지는 이 상황에서 익숙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지금까지 정부가 과감한 재정정책을 폈다고 볼 수가 없는데도 답이 없는 논쟁을 반복하는 모습을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발단은 지난 16일 국가재정전략회의다. 이 자리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국가채무비율을 40% 선으로 유지하겠다”고 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OECD 국가채무비율 평균이 100% 이상인데 우리나라만 40%가 마지노선인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발언은 관료에 대한 질책으로 받아들여진다. 정책적으로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쓸 시기에 ‘국가채무비율 40%’라는 조건에 갇혀 돈을 못 쓰고 있는 것 아니냐는 거다. 문재인 대통령이 질문을 던진 것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물론 보수언론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대표이던 시절에는 국가채무비율 40%를 기준으로 언급하면서 재정건전성 확보를 요구했으면서 지금은 완전히 다른 태도라는 식이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이를 근거로 해서 문재인 대통령 등이 불순한 의도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 정부가 선거용으로 세금을 퍼붓는 일을 하고 있고 이를 대통령이 정당화하려다 보니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인식이 달라졌다고 해서 언제나 그것이 ‘불순한 의도’를 보여준다고 해석할 이유는 없다. 대통령이 되자 야당 대표 시절과는 다른 문제를 알게 돼 판단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시기적으로 과거와는 다른 대응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거라는 해석도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세종컨벤션센터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 각종 통계 지표는 비상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는 6일 내놓은 2019년 경제전망에서 올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2.6%에서 2.4%로 하향 조정했다. 내년 성장률 전망치 역시 2.6%에서 2.5%로 낮췄다. 이것은 정부의 성장률 목표치인 2.6~2.7%에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정부가 목표달성을 못한다고 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흐름은 이전부터도 예견됐다. 한국은행이 성장률 전망치를 낮추면서 “추경 효과는 고려하지 않았다”고 밝혔던 게 대표적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추경이 통과되더라도 정부 목표치 달성은 쉽지 않다는 발언을 한 일이 있다.

최근 발표된 4월 고용동향도 좋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에 따르면 제조업 일자리는 작년 4월부터 13개월 연속 감소세이다. 바로 이 점에 인구감소 문제가 더해져 3, 40대 취업자 수는 각각 9만명과 18만7천명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공무원 시험 쏠림 현상 등을 감안하더라도 청년층 실업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 역시 드러나는 상황이다.

보수세력이 늘 문제삼는 최저임금 인상 여파 역시 과감한 재정정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고용노동부가 21일 개최한 최저임금 영향 분석 토론회에서 공개된 최저임금 현장 실태 파악 결과에 따르면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건비 부담이 커진 사업주가 고용을 줄이거나 손님이 적은 시간대의 영업시간을 단축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등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 일부 확인된다. 이런 점이 예상됐기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별도의 대책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미 내놓은 바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정부 지출은 “세금을 퍼붓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과는 달리 비슷한 수준이 유지되고 있다. 국가채무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GDP대비 38.2%로 3년 연속 동일한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추경을 고려해도 문제의 40%를 넘지 않는다. 관리재정수지는 2018년 -1% 위로 올라 오히려 상황이 나아진 듯 보일 정도다. 다만 통합재정수지로 본다면 2016년과 비교해 2018년까지 상황이 악화된 듯 보이는 측면은 있다. 종합하면 어쨌든 예산의 규모 자체는 커졌을 지 몰라도 이 정부 들어서 재정정책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으로 운용되는 흐름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여당 주요 인사들이 일제히 나서 확장적 재정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또 국가채무비율 40%를 지켜야 한다는 개념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제기된 주장대로 OECD 주요국의 국가채무비율은 100%를 상회하는 경우가 많은데다 유럽연합의 경우 60% 이내를 건전성 판단기준으로 본다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비교대상의 대다수가 선진국들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일련의 주장이 증세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정치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증세 논의의 필요성은 여당 일각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법인세율을 이명박 정부 이전 수준으로 되돌려야 한다거나 소득세 면세자 비율을 줄이되 고소득자에 대한 세금 부담을 늘리는 방향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 내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증세가 중심 이슈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증세 논의라는 사회적 배경이 없는 상태에서는 확장적 재정운용도 재정건전성 논리라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증세는 “거위의 깃털을 몰래 뽑는다”는 식으로 정부가 그저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상당한 수준에서 정치적 합의가 이뤄질 때에야 가능하다.

그래서 사실 재정정책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이러한 증세 논의를 책임지겠다고 나설 정치세력이 사실상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획재정부는 2020년부터 미중무역갈등이나 반도체 업황 악화 등으로 세수 감소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을 이미 내놓은 바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증세 논의를 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무심히 흘려 보내는 중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씁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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