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추석이 돌아왔고, 어김없이 ‘명절 증후군 없애는 팁’들이 각종 매체에서 쏟아지고 있다. ‘서로 칭찬하기’, ‘스트레스 풀어주는 혈 자리 누르기’, ‘선물하기’, ‘차례 간소화’, ‘명절 노동 분담’ 등이 주로 꼽힌다. 그리고 이 ‘팁’들은 삽화나 단어 몇 개만 달라졌을 뿐 몇 년째 계속되는 내용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명절 문화 개선’이 명절 증후군에 대한 겉핥기식 처방이라는 점이다. 명절 자체가 가부장제를 실현하는 의식으로서 명절 증후군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명절의 핵심인 제사는 가족제도의 주체가 부계혈통임을 재확인하는 의식이다. 여성, 특히 며느리는 이 의식에서 종속적·주변적 위치다. 제사 준비 노동을 가장 많이 감당하면서도 제사의 주체로 참여하지 못하고, 음복 때 구석진 곳에서 따로 상을 차려 식사하고, 그 와중에도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야 하는 역할이다. 아무리 ‘며느리’가 아내로서 남편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적 관계에서 높은 지위와 독립성을 확립했더라도 명절 증후군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수신지 작가 웹툰 며느라기 작품 일부 (페이스북 페이지 며느라기_)

그래서 여성의 명절 증후군은 단순히 높은 노동 강도로 인한 스트레스로 치환할 수 없다. 부계 중심 가족질서에서 요구되는 일방적·종속적 역할로 인한 소외의 경험, 그리고 이때 느끼는 모멸감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머니, 아내, 딸이라는 다중적 역할을 감내할수록 더욱 가중된다. 게다가 관습에 얽힌 구조의 힘은 강력해서, 아무리 감정적으로 선을 긋더라도 계속해서 그 구조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결국 명절 증후군은 며느리로서 겪는 일들을 그린 웹툰 <며느라기>의 주인공의 대사처럼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 순간들’에서 오는 것이다.

이는 명절 자체가 필연적으로 고부갈등을 낳는 이유이자, 고부 갈등과 장서 갈등의 차원이 다른 이유기도 하다. 고부갈등은 기본적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종속 관계에 기반하지만, 장서갈등은 ‘장모님이 설거지할 때 사위가 큰 눈치를 보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여성들이 ‘나를 지키지 못한 순간들’로 얻는 대가는 ‘(가부장) 정상 가족의 일원’이라는 안정감과 소속감이다. 즉 ‘며느리’, ‘아내’, ‘어머니’로서 인정받는 것이다. 재산이 장손에게 상속되고, 제사를 비롯한 장례 등 가족의 중요 대소사가 가장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사회적으로도 여성에게 분배되는 몫이 적은 상황에서 여성이 그나마 기반 삼을 수 있는 것이 가족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절날 잔소리는 일종의 ‘가부장 청문회’다. ‘언제 성적 오를래? - 언제 스펙 쌓을래? - 언제 졸업할래? - 언제 취직할래? - 언제 연애하고 결혼할래? - 언제 애 낳을래?’로 이어지며 반복되는 질문들은 ‘정상 가족 코스’를 충실히 밟았는지 점검하고 압력을 주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부장 어른들의 ‘호구조사’는 가부장제의 충실한 일원으로서 수행하는 일종의 명절 의례다.

남성과 가부장 구성원들 역시 이 ‘가부장 정상코스’에서 수혜자이지만은 않다. 남성이 가부장으로서 누리는 독립성과 지위는 온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부장성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은 여성의 돌봄 노동과 헌신이 필수 불가결한, 위태로운 것이다.

그래서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지 않는 방법은 명절과 손절하는 방법뿐이다. 단기 처방에 불과한 명절 문화 개선이더라도 ‘칭찬하기’보다는 ‘처가 먼저 방문하기’, ‘가사노동 평등 분담’ 등 기존 가족 역할을 비트는 방법이어야 한다. 나아가 궁극적인 명절 증후군 해소 방안은 가부장-한민족 위주의 ‘정상 가족’에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정상 가족’은 가부장이 나머지 식구에게, 시댁이 며느리에게 희생을 크든 작든 요구하는 구조이고, 동거·미혼모·다문화·퀴어 등 ‘정상 가족’ 외 구성원들을 문화적·제도적으로 배제한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제도적 대안으로는 ‘생활동반자 보호법’을 꼽을 수 있다. 생활동반자 보호법은 1999년 프랑스에서 시행되고 2014년 진선미 의원이 발의했던 법안으로, 혈연 및 혼인 관계에 얽혀 있지 않은 동거가족 구성원들이 기존의 가족 관계와 마찬가지로 법률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생활동반자에게 가족의 권리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부양의 의무, 가사로 인한 채무의 연대 책임 등도 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양한 정상 가족’이 생기게 되어 기존 가족 제도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더불어 기존 가족구성원들도 본인의 역할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진정으로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 화목하게 지낼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혈연 외 사회 구성원들끼리 유대와 연대가 보다 긴밀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명절은 가부장제의 증후군이다. 명절날 제사는 정확히 말하면 조상신이라기보다 ‘가부장제 신’을 모시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은 여성들의 노동력과 인격을 제물로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정상 가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잘되라고 하는 소리’라는 명목으로 인권을 침해해 우울증과 이혼, 살인까지 유발하며 오히려 가족 유대를 해치고 있다. 이번 추석부터라도, 여성보다도 남성들이 나서서 ‘명절 손절’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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