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 편의 몽환적이고도 기괴한 무대를 보고 있다. '어게인 2002 광주의 기적'을 호소하며 다시 바람이 불기를 희구하는 '더좋은 민주주의포럼 전국네트워크 발대식' 무대다. 주인공은 안희정이었지만 정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같이 무대에 선 몇몇 조연들이었다.

그 가운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피부과 전문의 함익병 원장이 보인다. 지상파 <백년손님> 프로그램을 같이 한 장모와 아내마저 동반한 채 안희정을 빛내는 무대에 들러리를 자처한 그이, TV조선 <강적들>이란 프로그램에도 출연해서 보수인사로 잘 알려진 그가 안희정 무대에 함께 하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TV조선 <강적들>

안희정의 대연정이 본디 그런 것이니까.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만 있다면 아무거나 넣어도 무방하다는 게 짬뽕정신을 지향하는 대연정의 취지 아닌가.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정체도 불분명한 것들을 이것저것 섞어서는 곤란하다.

함익병은, 알다시피, 월간조선 인터뷰로 화제가 된 사람이다. 4년 전 그는 "독재가 왜 잘못된 거냐. 더 잘 살 수 있으면 왕정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정희가)독재를 선의로 했는지, 악의로 했는지, 혹은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고 했다.

함익병은 또 "국민의 4대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투표권이 없어야 한다"면서 "여자는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으니 4분의 3만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4대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재인 지지의사를 표명한 아들의 투표권을 묵살하기도 했다.

지난 발언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보다 독재를 찬양하며 여자의 투표권을 부정하고, 부모의 권위로 자식의 투표까지 제한하는 이런 인물마저 안희정표 짬뽕에 넣어도 되는지 의문이다. 안희정은 그가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내세운 "개혁에 찬성한다면"이란 조건에 이것이 부합한다고 생각한 걸까?

배우 명계남 [연합뉴스 자료사진]

아니, 그 이전에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광주의 정신과 광주의 기적을 노래하면서, 박정희의 선의와 독재의 효율성을 찬양하고 남존여비와 가부장적 구습을 강요하는 시대착오적 인사를 무대에 올려 안희정 지지를 독려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그것은 광주를 두 번 죽이는 짓 아닐까?

나의 당혹감은 함익병에 이어 명계남이 무대에 등장하면서 더 커졌다. 명계남은 연극배우답게 온몸으로 참석자들의 감성을 두드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그러면서 "안희정의 정치철학(대연정)을 야합이라고 공격하는 부당함을 멈춰 달라. 그것은 불의"라고 호소했다.

명계남의 눈에 안희정의 대연정이 연합과 정의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눈엔 야합과 불의로만 보인다. 안희정과 함익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그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나는 오히려 이런 그림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 명계남이 이상해 보인다. 내가 아는 그 명계남이 맞는가 싶을 정도다.

명계남은 발대식 직전에 "과거 날 서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써가면서 내가 원하지 않는 세력을 향해 분노를 표현해 온 것이 사실"이라며 "안희정 지사를 보면서 얼마나 편협했는지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한이 없다"고 과거를 회오했다. 그러나 이 또한 내게는 "이전에 짜장면이 좋았으나 이제는 짬뽕이 좋다"는 말로밖에 안 들린다.

왜 분노를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분노는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분노를 '피바람'으로 일방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안희정식 편협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천만 촛불을 광장으로 불러 모은 힘이 무엇이었는가? 불의에 대한 분노 아닌가? 그 분노가 박근혜를 탄핵·파면하고 최순실 일당을 구속시키지 않았는가?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안희정 충남지사가 23일 오후 광주 서구 염주동 빛고을체육관에서 열린 더좋은 민주주의포럼 전국네트워크 발대식에서 정견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정치인들이 해야 할 것은 그 분노를 정의로 승화시켜 이명박근혜 9년 동안 켜켜이 쌓인 이 땅의 적폐를 청산하고 옛것의 어둠을 몰아낸 자리에 새로움을 심는 일이다. 그것이 국민의 뜻이고 시대적 열망이며, 그 뜻과 열망이 정권교체 욕구로 타오른 것 아닌가. 그런데 어둠의 세력과 대연정하는 것이 정의라니, 이게 말인가 소인가.

나는 "호감과 비호감 모두 1위인 문재인 대신 확장력 있는 안희정이 나서야 안전한 본선에 나설 수 있다"며 안희정을 지지한 명계남의 선의를 이해한다. 그러나 자유한국당과 손잡고 그들과 권력을 나누어 공동정부를 꾸린다면, 승리한다 한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같은 당 문재인의 선의는 부정하고 박정희와 박근혜의 선의는 인정하는 안희정의 선택적 선의가 무섭다. 독재를 추앙하고 여성인권마저 거부하는 반개혁적 수구까지 무분별하게 끌어들이는 안희정의 대연정이 두렵다. 정당한 분노마저 거세당한 채, 함익병과 명계남이 한자리에서 어우러지는 이 기묘한 난장극이 몸서리쳐지게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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