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시사제작국 탐사보도팀에서 2년 넘게 기획·취재해 온 <훈장> 2부작(1부 <간첩과 훈장>, 2부 <친일과 훈장>)이 또 다시 불방 위기에 처했다. 시사제작국 간부들은 전례 없는 장기간 데스킹을 한 후, 각 편에 대해 매우 세세한 지침을 내렸는데, 친일 행적자들에게 훈장을 다수 수여했던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다룬 2부 <친일과 훈장>의 경우 원고의 1/3을 삭제할 것을 지시했다. 공교롭게도 1/3 내용 대부분이 ‘박정희 시대’여서, 결국 청와대 눈치보기 때문에 불방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내부 비판이 나오고 있다.

KBS 탐사보도팀은 대한민국에서 수여됐던 훈장 70만 건의 내역을 통해 광복 70주년을 돌아보는 기획 2부작을 2013년부터 준비해 왔다. 제작진은 훈장 내역이 개인정보라고 주장하는 정부와 정보공개 청구소송까지 벌였고, 자체 취재를 통해 정부가 끝내 숨긴 내용도 찾아냈다.

그러나 KBS는 지난 6월 말과 7월 초로 예정됐던 방송일을 메르스 사태를 이유로 7월 말로 미뤘다가, 이후에는 데스킹이 덜 됐다며 방송일자를 확정하지 않았다. 지난달에는 <훈장> 방송을 준비하고 있던 팀장과 기자 2명이 타 부서로 인사 조치되고, 사측이 노측의 공정방송위원회 요구를 거부하면서 의혹은 커져 갔다.

이달 초, 데스킹이 거의 마무리된 1부 <간첩과 훈장>을 20일 <시사기획 창> 시간대(화요일 오후 10시)에 내겠다는 결정이 났으나 <특별좌담: 한 맺힌 그리움, 이산가족 근본 해법은>이 편성되며 27일로 밀렸고, 이마저도 <시청자칼럼 우리 사는 세상 4000회 특집: KBS의 중심에는 시청자가 있습니다>가 돌연 편성되며 방송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26일 현재, 2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도 <훈장> 방송은 기약이 없다. 10차례에 걸쳐 20시간 넘도록 데스킹 회의를 했지만 제작진에게 돌아온 것은 간부들의 ‘구체적인 수정 및 삭제 지시’ 뿐이었다.

간부들이 삭제 요구한 원고 내용 대부분은 ‘박정희 시대’

<훈장> 제작진은 26일 오전 성명을 내어 <훈장>을 방송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 사측을 비판했다. 제작진은 “KBS 역사상 유례없는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데스킹을 받으면서도 제작진은 방송을 내야한다는 일념 아래 성심성의껏 데스크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였지만 결론은 참담하다. 아직 방송일조차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작진에 따르면 시사제작국 간부들은 2부 <친일과 훈장>을 6차례나 데스킹했으나 ‘수정’ 차원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프로그램’을 요구하고 있어, 제작진과 간부들 사이의 논의는 완전히 중단된 상태다. 제작진은 “제작진이 양심을 저버리거나, 실체적 진실에 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는 한, 2편은 불방될 것이 명확해 보인다”고까지 했다.

특히 김형덕 탐사제작부장은 ‘뉴스가 아니다’, ‘프로그램 기획의도와 맞지 않다’, ‘기자들이 편협하다’는 이유로 <친일과 훈장> 원고 1/3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는데, 제작진은 해당 내용 대부분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부분이라고 밝혔다.

▲ 시사제작국 간부들은‘뉴스가 아니다’, ‘프로그램 기획의도와 맞지 않다’, ‘기자들이 편협하다’는 이유로 <친일과 훈장> 원고 1/3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는데, 제작진은 해당 내용 대부분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부분이라고 밝혔다. (사진=대통령기록관)

김형덕 부장은 ‘친일 행적자들이 받은 훈장의 적절성 여부가 기획의도’라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친일과 훈장>은 처음부터 ‘독립’, ‘친일’, ‘일본인’ 훈장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광복 70년을 되돌아보되 이에 대한 보수와 진보 양쪽 시선을 공정하게 담겠다는 것이 기획의도였다. 다양한 시각이 있으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취재도 양쪽의 해석과 평가를 담도록 최선을 다했다”며 “단 한 번도 ‘친일 행적자들이 받은 잘못된 훈장’을 중심으로 다루겠다고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1편 <간첩과 훈장>에 대한 논의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제작진에 따르면 김형덕 부장은 ‘조작’이라는 표현과 조작을 연상할 수 있는 ‘간첩으로 만들어 내는’ 등의 표현과 인터뷰 내용을 모두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이현주 시사제작국장은 부장 데스킹을 마친 원고에 대해 △무죄 사건은 전체 간첩 사건 중 극소수라는 점을 적시할 것 △무죄 사건이 모두 조작이 아니라는 것을 구분해서 적시할 것 △대공활동 전체에 대한 폄훼는 없어야 할 것 △최근 논란이 되고 있으니 한홍구 교수 인터뷰는 뺄 것 △국방부 반론을 더 넣을 것 등을 지시했다.

제작진은 “이 모든 요구들에서 ‘진실을 찾아가려는 열정’이 느껴진다면, 또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 보자’는 진심이 느껴진다면 무엇을 못하겠나. 그런데 왜 그런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을까요?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의심받고 검열을 받는 느낌이다. 팀장, 부장, 국장 누구에게도 방송을 내겠다는 의지를 느낄 수가 없다”고 질타했다.

제작진은 “이 모든 사태가 현재의 사장 선임 과정과 결코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조대현 사장의 연임에 걸림돌이 될 만한, 뉴라이트 사관을 가진 이인호 이사장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그 어떤 내용도 방송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강동순, 고대영 등 다른 사장 후보에게도 밉보일 내용은 담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7월 말에 취재가 다 끝난 프로그램이 석 달이 되도록 방송되지 못하는 사유를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지 말라”고 전했다.

제작진은 사측이 <훈장> 시리즈를 방송할 의지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방송이 기약 없이 미뤄지자, 부서 간 근무협조를 받으며 <훈장> 방송을 준비했던 한 기자는 라디오뉴스제작부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 기자는 “27일도 안 되고 이후에도 방송날짜를 잡지 않았는데, (원 부서에서도) 결원이 생겨 무작정 안 가겠다고 할 수 없어서 이쪽으로 오게 됐다”며 “결국 대통령의 아버지 내용 때문에 낼 수 없는 것 아닌가. 그 내용이 아니었다면 내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기자는 “(27일 편성이 취소된 후에도 사측은) 다른 아이템들이 준비돼 있다고 얘기한다. <훈장> 1부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것만은 명백하다”며 “(방송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KBS 관계자는 “특정 인물이나 특정 대상에 대해 수정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고, 전반적으로 오류가 있거나 부적절한 내용에 대해 기준을 가지고 수정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데스킹 과정을 다 거친 게 아니라 데스킹 중이다. 워낙 중요한 아이템이라 제작진의 의견을 수렴하고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토론을 계속하고 있다. 불방 수순으로 접어든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훈장> 방송이 연기된 데 대해서는 “이번주는 수신료 현실화를 위해 공영방송의 역할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집중 편성하는 주간이다. 그래서 26일 <6시 내고향>에서는 가뭄 특집을, 27일 오후에는 <이산가족찾기 특집 ‘65년만의 상봉’>과 <시청자칼럼 우리 사는 세상 4000회 특집: KBS의 중심에는 시청자가 있습니다>가 그 일환으로 편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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