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인류를 조롱하고 있는거지?”
- 로베르 브레송 <아마도 악마가> 중

아마도 나는 여러 가지 얼굴로 이루어진 동물인 듯하다. 문을 나서면 씩씩해지고 다시 문을 닫고 돌아오면 침울해진다. 한동안 이것을 고백하지 못하다가 어젯밤 술김에 진실을 털어놨다. 같이 있던 친구들이 안쓰럽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충고했다. “그건 죄다 술 때문이야. 매일 술을 마시다보니 술에 취하지 않는 날엔 고독해지는 거지.”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한다.

▲ 미국드라마 <스트레인>의 한 장면. 악마 같은 존재는 실재하지만, 이 모든 게 악마 때문은 아니다. 그건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한동안 일베, 김군, 극우… 이런 것들에 관심이 쏠려있었다. 지면상에서도 여러 차례 말했듯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가 마주한 현실에 텅 빈 채 존재하는 공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우회하고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마주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향을 띄는 많은 사람들, 혹은 그런 생각에 대해 혐오와 분노를 표출하지만, 그런 혐오와 분노의 방식조차도 그들을 닮을 뿐이다. 요컨대 ‘진보주의자들’은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대함으로써 끊임없이 패배의 늪으로 빠지고 있다.

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세븐틴 セヴンティーン>(1961)이 오군이든 김군이든 누구든 깊숙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텍스트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열일곱의 고등학생이지만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자신이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외로운 소년이다. 그는 자신이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여기며 삶의 어떤 구석도 긍정하지 않는다. 그저 가끔 성인 잡지를 보며 자위를 하거나 누나와의 정치적 언쟁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발버둥을 칠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그에게 색다른 사건이 찾아온다. 학급에서 화려한 말발로 여학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친구와 함께 한 극우파 집회에 참석하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고, 자신에게는 지금껏 스스로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자아, 남다른 모습이 있다고 느낀다. 모두가 몰랐지만 그는 사실 아주 매력적이고 멋진 남성이었다는 것이다. 이 소년은 나중에 일본 사회당 당수 아사누마 이네지로에게 칼을 꽂는 테러리스트 야마구치 오토야를 모티브 삼아 만들어진 캐릭터다.

어쩌면 우리의 ‘X군’의 이면에는 ‘세븐틴’과 같은 그런 모습이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물론 전혀 예상치 못한 사연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럴듯하게 늘어놓기엔 한참 모자란, 특별한 사연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나의 곤경과 빈궁함 따위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요컨대 X군은 우리가 애써 모른 척하거나 잊고 있었던 우리 자신의 어떤 모습일 수 있다.

로베르 브레송은 오에 겐자부로보다는 16년 쯤 늦은 1977년 곤경에 빠진 어떤 청년 샤를에 대한 영화 <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ment>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지독하리만치 염세적이다. <소매치기>, <무셰트>, <발타자르>… 브레송의 여느 영화들처럼 차갑고, 그 영화들의 여느 주인공들처럼 마지막에 죽는다. 조금도 장렬하지 않게,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는 생각이 날 거라 믿었는데…” 라고 말을 잇다가 채 마무리 짓지 못한 채로.

지적이지만 나르시시즘에 빠진 샤를은 늘 몸에 독약을 품고 다니다가 당대 프랑스 사회의 여러 풍경들을 찾아간다. 벌목되어 쓰러지는 나무들, 환경운동의 현장, 정치 집회나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이 있는 성당, TV 속에서 파괴되는 세계 어딘가 전쟁의 단편들. 그러나 어떤 것도 그의 허무를 채우거나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의 근거, 삶의 이유를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는 정신과 의사에게 “모든 사람들이 바보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할 정도로 삶과 관계맺음들도 혐오하지만 그것을 포기하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는 적극적인 행위도 혐오하는 그야말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유를 찾지 못하는 인물이다.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해 가장 손쉽게 (그러나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일 게다. 1977년의 ‘샤를’은 당대 프랑스 사회가 마주한 어떤 ‘한계’를 드러낸다. 68혁명이 미끄러진 즈음,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이 퇴조하고 정치사회 운동이 함정에 빠지기 시작했을 즈음이다. 이는 많이 다르긴 하지만 80년대 대중적인 사회운동의 기운이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로 꺾이고 난 후, 우리 사회가 마주한 기나긴 ‘후퇴’의 시대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이렇게 대안적인 사회를 건설하리라는 대중적 운동이 한풀 꺾이고, 한동안 어떤 희망의 단초를 만들어내지 못하다보면 냉소주의적이며 반정치적인 풍조는 만연하게 된다.

IMF 이후 소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정권’이라는 이름으로 집권했지만 우리 사회는 여지없이 후퇴를 거듭했다. 경제 지표상에선 주가지수도 오르고 국민소득도 올랐지만, 대다수 노동자 서민에게는 끊임없이 삶이 추락하는 10년이었던 것이다. 10년 사이 비정규직이 되고, 취업할 자리가 점점 없어져온 사람들에게 이 시절이 좋았다는 말들이 좋게 들릴 리 없다.

모든 반역에 이유가 있듯, 모든 모순에는 복잡하고 중층적일지언정 이유가 있다. 어떤 이들의 납득 불가능하고 설명되지 않는 행위에도 마찬가지다.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는 그런 납득 불가능한 세계를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풀어놓고 또 조직한 작품이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전쟁 장면, 벌목되는 나무들, 잔인하게 학살되는 물개들. 브레송은 그 쇼트가 꼭 그곳에 느닷없이 붙어야만 이 세계의 어떤 모순들이 ‘이미지’로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버스 안. 두 청년이 서로에게 묻는다. “누가 인류를 조롱하고 있는거지?”, “누가 우리를 제멋대로 흔들어대고 있는 거지?” 버스 안에서 내내 씨니컬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중년 남자가 말한다. “아마도 악마가!”(The Devil, Probably!) 그러자 갑자기 바깥의 어떤 사정으로 인해 버스가 멈추고 운전수가 밖으로 나간다. 우리는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하며 공연히 이 버스 안만을 돌아볼 뿐이다. 정말 악마가 저 바깥에 있는 걸까? 그것이 이 버스를 멈추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걸 지치게 만들고 냉소하게 만든 걸까? 왜 (68년 즈음에도 그 모든 것에 대해 시니컬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것만 같은) 중년남자는 서슴지 않고 ‘악마’라는 말을 내뱉은 걸까?

말을 뱉기, 글을 쓰기 어려운 시절이다. 꽤 오랫동안 나도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다. 용기 있고 단호하게, 혹은 비장하게 어떤 말을 뱉기에는 우리의 곤궁의 겹이 두텁다. 끈기 있고 성실하게 세상의 모순들을 고발하는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친구가 말했다. 쓸데없는 말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나는 매우 자주 이곳저곳에서 ‘쓸데없는 말’을 하며 살고 있다. 이 세계는 우리의 발화들이 점점 쓸데없는 것, 쓰레기들이 되도록 쉴 새 없이 추동하고 방관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조현아의 땅콩 회항과 잔혹하게 가족을 살해한 치정극의 깊은 사연, 박근혜 정권의 노동자 탄압이나 삼성 이재용의 범죄수익 2조 원, 송파 세모녀의 죽음, 보신탕이 되기 위해 죽어가는 개들. 이런 것들이 악마 때문일 리 없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는 난해함, 두텁고 높은 벽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 난해함을 돌파하는 건 오직 꾸준하고 끈기 있는 실천과 사유의 힘이다. 문제는 뭐가 진짜 문제인지 알면서도 좀처럼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쇼트를 이어 붙여야 한다. 이를테면 (우스꽝스러운 생각이지만) 뜬금없이 붙는 다른 쇼트 대신 76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장면이었다면 이 빈틈없는 좌절의 영화엔 빈틈이 생겼을 것이다. 이어 붙여진 다른 쇼트들이 샤를을 다른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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