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소린가? 자네, 앞잡이 노릇도 모자라 인제 거간꾼 노릇까지 하려나?” - 김봉구, <방구아저씨> 중

방구아저씨와 거간꾼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방구 아저씨>라는, 코믹한 제목의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성실한 노동자이자, 마을 어린이들의 우스꽝스럽지만 친절한 ‘친구’였던 김봉구가 어떻게 해서, 누구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는지 당대의 작은 비극에 대한 목격자의 시점에서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안골 마을엔 방귀쟁이 아저씨 김봉구가 있었다. 방구아저씨 집에는 항상 아이들로 그득했다. 방구아저씨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좋은 세상은 꼭 온다!” 마치 막연한 낙관과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주위의 누군가처럼 말이다. 그는 일본 순사의 앞잡이 노릇을 자처하던 마을 이장의 고발, 그리고 자신을 수탈하려던 순사 이토에 의해 나무 순사봉에 머리를 맞았고, 한 줌의 흙이 되어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아이들은 큰 슬픔에 잠긴 나머지 “아저씨의 방귀 자국 같은 흰구름”도 보지 못한다.

안골마을 이장의 캐릭터가 뇌리에 남는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일제에 소극적이나마 협력하기를 택했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게다. 그러다 그는 더 ‘잘’ 살아남기 위해 거간꾼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배자를 대신해 사람들을 수탈하고 협잡하는 것에 대해 그리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에게 자기 역할과 삶이 있듯 자신에게는 그런 삶이 있을 뿐이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혹은 그런 행동이 함께 살아온 사람들을 등쳐먹는 행위라기보다는 되려 자신이 희생해서 모두를 위한 대승적 길을 만드는 것이라고 최면을 걸었을 수도 있다. 2차 대전 시기 독일 나치 행동대원들 중에서도 자신이 모두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여기던 이들이 상당수였다. 그들은 자신의 파괴적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보단 자신의 그런 살육 행위들이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고 여겼다. 누구도 그런 끔찍한 일을 대행하는 것은 원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거간꾼은 우리 주위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도덕적으로 힐난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그 거간꾼들을 무의식적으로 동경하기도 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명제가 유일무이한 존재론으로 성립되는 사회에서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런 거간꾼들은 극소수 지배계급을 대신해 치루는 자신의 그러한 행동이 다른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끔찍한 상태, 지옥이나 다름없는 사회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한다. 아니 오히려 그런 매개적 역할을 자임한 것은 사회의 안정성을 고취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유익하고도 헌신적인 삶이라고 자부할지도 모른다.

21세기의 거간꾼, 그대 이름은 ‘노조파괴 브로커’

본래 ‘거간꾼’이란 “사고파는 사람 사이에 들어 흥정을 붙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영어로는 브로커 broker. 판이 커지고 이목이 모이는 곳마다 이런 거간꾼들은 모이기 마련이다. 뭔가 건져 먹을 게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옛부터 거간꾼 노릇이야말로 탁월한 장사 수단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A와 B 사이에서 오가며 잔머리만 잘 굴릴 수 있다면 양자 모두에게 조금씩은 챙길 게 생기기 때문이다. 뉘앙스가 좋지 않아서 그렇지 거간꾼이라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거래의 편의성, 시장의 넓은 범주 안에서 거래가 ‘결정’되는 순간을 만들기 위해 중개인들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그것이 노사관계로 갈 때다.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우위는 항상 자본가에게 있다. 정치나 법 따위의 시스템이 죄다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조형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노사관계는 점점 절대적인 불균형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모두 합해봐야 10퍼센트 남짓이고 그마저도 제대로 조직되어 있고 쟁의행위를 할 수 있는 노동조합은 거의 없다. 자주성과 노조민주주의를 포기한 상당수의 노동조합들이 매년 임금을 결정할 권한을 사측에 위임하고 있다. 우리가 보수언론에서 볼 수 있는 투쟁하는 노동조합은 얼마 안 된다.

이렇게 비대칭적인 노사간 역관계에서도 거간꾼들이 있다. 이른바 노조파괴 전문 브로커들이 그들이다. 지난 2011년 5월 18일 충남 아산의 유성기업 공장에 들이닥친 공권력의 배후에는 창조컨설팅이라는 어마무시한 노조파괴 전문가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있었다. 이들은 미리 정한 시나리오에 따라, 2011년 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하자 이와 동시에 공장에 직장폐쇄를 때렸다. 당시 MB정부는 이를 빌미로 불과 일주일 만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귀족노조’로 몰아 붙였고 이후 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진행했다.

상신브레이크, 만도, 에스제이엠 등에는 수 백여 명의 용역깡패도 동원됐다. 이 과정에서 용역깡패에게 맞아 심하게 다친 노동자, 절망 속에서 일터를 떠나거나 노조를 포기해야 했던 노동자도 부지기수다. 그 노동자들의 가족까지 합한 수만큼의 삶을 망가뜨린 것이다. 이런 노조파괴 공작은 사측과 창조컨설팅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고, 유성기업과 에스제이엠 공장 등에서 단결한 노동자들의 능동적인 투쟁과 우호적인 사회 여론에 힘입어 제어할 수 있었다. 이는 정권과 자본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전국적 규모의 노조 깨부수기 파도를 막은 중요한 투쟁들이었고, 노조파괴 전문가를 자처하던 이들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80년대에 있음직한 전근대적인 공작들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련된 거간꾼의 등장

그러나 오늘날의 노조파괴는 보다 세련된 형태로 다시 등장했다. 합법적이고도 세련된 전술로 무장한 노사관계 전문가들이 나타나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만든 민주적인 노동조합들의 교섭 과정에 하나둘씩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단지 교섭에만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노무관리 전략전술을 수립하는 것에도 밀도 높은 개입력을 갖고 있다.

바로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 노사대책본부가 그렇다. 이 본부는 재벌 대기업과 가짜 협력사 사이에 맺어진 하도급 시스템 하에서 교섭권을 위임받아 외양적으로는 하청 사장들 대신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상대하는 역할을 자임한다. 그러나 실상 경총 노사대책본부에게 하청업체 사장들의 입장이 중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재벌 노무라인의 고위관리자인마냥 이들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가깝다. 21세기 최고의 거간꾼이 등장한 것이다.

재작년 노동조합을 만들어 첫 임단협 교섭에 돌입했던 삼성전자서비스 이후 SK, LG에도 이들이 개입되어 있다. 이들은 교섭에서 최대한 시간을 질질 끌면서 노동자들의 진을 빼는 방식을 즐긴다. 업체 폐업 등 노동자들이 간접고용된 상태라는 걸 악용하면서 대체 인력을 투입하고, 노동자들의 생계 목줄을 쥔 채 겁박한다. 지난해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벼랑 끝 상황에 내몰려 결국 염호석 열사가 죽음을 택한 순간 전까지 과정엔 삼성 대신 궂은일을 처리해온 경총이 있었다. 노조 탄압의 전략적 거간꾼 역할을 충실하게 했던 것이다.

▲ 4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 호텔에서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주최로 열린 제38회 전국 최고경영자 연찬회에서 김영배 경총 회장 직무대행이 강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보이지 않는 조종자

오늘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이 극심해지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프로페셔널하고도 터프하게 처리할 줄 아는 능력을 겸비한 자가 아마도 그들이 말하는 ‘노사관계 전문가’일 것이다. 이를테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사이에 중개인 노릇을 하며 말을 보태고, 골리앗의 두뇌 역할을 하는 거간꾼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지난 2월 5일 2015년도 2차 임금교섭이 예정되어 있었던 삼성전자서비스 50여 개 업체들은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같은 내용의 교섭 거부 공문을 노조에 보내기도 했다. 누군가가 일괄적으로 컨트롤하며 써주고, 업체들에게 보내준 것이다.

이론적으로 잘 훈련되었으며 무수한 교섭의 경험을 지닌 경총 노사대책본부 관계자들은 세련된 거간꾼들이다. 그들은 당장의 개입들에서 꽤 좋은 성과를 이루고 있고, 극심한 노동조건 속에서 탄생되어 단결력의 측면에서 강한 구심력을 지닌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중적인 투쟁을 꽤나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시간만 잘 끌면 된다는 것이 그들의 핵심 공식이다. 원하청 관계를 오락가락하면서 요구에 대해서는 “원청에서 이미 예산이 정해져 있어서 안 된다” 답하면 그만이고, 하청에 대해서는 “갑자기 내 말을 안 듣는다”고 말하면 그만인 것이다.

지난해 초 삼성전자서비스 교섭에서도 이미 원청의 수수료 단가가 정해져서 임금 인상이 어렵다고 답하면서, 동시에 하청에 대해선 “업체마다 달라서 어렵다”는 식으로 회피하곤 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지난해 7월 기준단협 체결에 따른 고소고발 상호 취하 약속을 해놓곤 양천센터에서 조합원들을 고발한 1건에 대해 취하하지 않고는 “양천센터가 말을 안 듣는다”고 무책임한 답을 늘어놓기도 했다. 고의적이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세련된 학살

헌데 이런 공식은 당연히도 노동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어떤 이유에서든 끔찍한 일들을 만들어내기 일쑤다. 이들이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요구를 거절하며 시간을 끌수록 생계의 최저점에 몰려있던 노동자로서는 절망적 상황에 몰리기 때문이다. 마치 방구아저씨가 죽음에 내몰렸던 것, 삼성전자서비스 염호석 열사가 죽음에 내몰렸던 것처럼 말이다.

재벌 대기업들은 단기적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이룰 수 있겠으나 장기적으로는 시민들의 원성도 커지고, 노동자들의 일에 대한 열의는 떨어뜨리는 한편, 자본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높이는 등 역풍을 조장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재벌 자본에 맞선 여러 투쟁들도 ‘우리도 노동조합을 해야 살 수 있다’고 깨닫기 시작한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한 증거다. 당장 어떤 투쟁에서 노동자들을 짓누를 수 있어도 그 다음 타자가 도미노처럼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정세라는 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조건이다.

조금 낙관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거간에도 아랑곳 않고 남다른 내성을 갖고 투쟁할 수 있는 힘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당연히 생길 것이다. 인간이란, 더군다나 집단적으로 뭉친 ‘인간들’의 조직이란 본래 그렇다. 희망연대노조과 알바노조 등 노동유연화 이후 시대의 새로운 노동조합 형태들도 그것의 한 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의 지속은 노동조합운동의 체질 개선을 촉진하고 새로운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자생적으로 양성하는 예상치 못한 효과도 낳고 있다. 세련된 거간꾼들에게 뜻하지 않게 고마운 일이다.

그럼에도 적어도 노사관계에 있어서는, 자본에게 매우 효용적인 역할을 자임하는 이런 거간꾼들, 용역깡패를 동원하는 전근대적 거간꾼이든 세련된 방식으로 생계의 목줄을 죄고 겁박하는 세련된 거간꾼이든 교섭권을 위임함으로써 노동권에 대한 탄압을 외주화하는 것은 폐기돼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원리에 합당하다. 이들의 존재는 단기적으로는 멀쩡한 노사관계가 보다 악화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오늘날 근대 국가가 헌법으로 규정한 노동권이 추락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아흔아홉번 패배할지라도…

▲ 홍명교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교육선전위원

그런데 이렇게 경총이 파견한 세련된 거간꾼과 악다구니 하는 사이 횡령으로 구속된 SK 최태원 회장과 불법적 경영승계라는 비난을 벗지 못하고 있는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사회적 비판의 화살이 잠시 멈춰진 듯하다. 자본가들이 당장 노조를 탄압하는 일에 거간꾼을 두는 이유도 그것에 있을 게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저 거간꾼들을 대하면서도 항상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는 자본가들을 응시하고 이에 맞선 몫 없는 이들의 전선을 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이 어려운 점이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패배를 통해 성장하고 끝내는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 패배들 속에서 단련되고 또 더 크게 단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소설 속 ‘방구아저씨’는 자신만의 싸움을 우직하게 하다가 억울하게 죽었지만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는가. 우리는 방구아저씨를 사랑했던 아이들처럼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도 방구아저씨처럼 우직하게, 그러나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또 싸워나가겠다고 결심한다. 우리 모두가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는, 방구아저씨의 편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그 순간, 거간꾼의 시대는 막을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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