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급진좌파연합(SYRIZA)이 지난 주말 치러진 그리스 조기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시리자는 36.4퍼센트의 득표를 얻어 총 300석 중 149석을 차지했다. (그리스는 선거 1위를 차지한 당에게 50석을 우선적으로 배당하는 독특한 선거제도를 갖고 있다.) 과반 도달에는 2석 차이로 아쉽게 실패해 단독정부 구성은 어렵게 됐지만 어쨌든 이 정도의 결과는 예측을 넘어선 것이다.

중도좌파 정당인 포타미와의 연정이 예측되던 시리자는 예상과는 달리 우파 신생정당 그리스독립당과 연정을 구성할 것으로 보인다. 시리자처럼 급진적인 좌파에 속하는 그리스 공산당은 꽉 막힌 스탈린주의 정당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공산당은 시리자와 연대하기보단 도리어 배외하기를 택했고, 중도좌파인 포타미는 유로존 탈퇴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며 친 유럽연합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시리자의 좌우 양편에서 유로존이나 유럽연합 중심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흐름과는 다른 대안적인 유럽, 트로이카와 구제금융 재협상을 요구하는 급진좌파연합과의 연정이 어려운 측면이 있었던 것. 결국 시리자는 자신들처럼 구제금융에 반대하는 우파 정당 그리스독립당을 택했다. 불안 요소가 잠재되어 있지만 당장의 방향에 있어서는 현실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후쿠야마는 틀렸다”

시리자의 압승이 확실시되기 시작한 25일 밤. 개표방송을 보던 시리자 활동가, 지지자들은 ‘벨라 차오'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벨라 차오(Bella ciao; 안녕, 내 사랑)〉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에 저항하던 파르티잔들에게서 구전되어온, 유럽의 좌파들이 부르는 유명한 노래다. 파티 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업로드 되었는데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답고 뜨거운 파티가 있을까 싶다. 어떤 여인들은 서로를 꼭 얼싸 안는다. 젊은 여인은 혼자 서서 눈물을 흘리고, 바로 옆의 뿔테 안경 쓴 할아버지는 그 소란 속에서도 조용히 서서 무언가 생각한다. 청년들은 구호를 외친다. 노인들은 흥겨운 춤과 노래를 멈추지 못한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에서 인류의 역사는 결국 자유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로 끝나고, 인류는 이제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 없기에 역사는 권태에 빠질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믿었고, 그 말의 반은 맞았다. 좋든 싫든 우리는 실제로 거대한 권태에 빠져있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 그리스 시리자의 젊은 지지자는 말한다. 역사의 종언을 고했던 후쿠야마는 틀렸다, 지금부터 유럽의 남쪽에서부터 다시 새로운 꿈이 시작될 것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라고.

“트로이카, 고 홈!”

그리스 부채의 채권자 유럽중앙은행에 의한 긴축재정 구조조정의 압박 속에서 만성적이고도 천정부지의 실업률에 시달리던 그리스 민중들은 ‘다른 세계’를 위한 낯선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이제 더는 트로이카(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 유럽연합)에게 시달리지 않겠다’며 “Troika Go Home!”을 외쳐왔고, 구제금융 조건의 재협상을 주장하고 실업 문제 해결, 공공부문 구조조정 중단을 주장해오던 시리자 당수 치프라스를 새로운 총리로 선출했다. 2010년 구제금융 이래 제공된 부채의 댓가로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겨 왔기 때문이다.

물론 시리자에게 장밋빛 미래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 오히려 집권기의 혁신적인 변화와 대안 마련에 실패한다면 더 나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트로이카에 의한 거센 압박에 무너질 수도 있고, 혹은 그리스 내부의 자본 권력과의 세력 싸움에서 밀릴 수도 있다. 시리자의 총선 승리 이후 온갖 어두운 전망과 악담을 늘어놓는 한국의 보수언론들의 논조만 보아도 앞으로의 도전이 녹록치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문득 1997년 우리와 비교하게 된다. 당시 한국은 IMF와 세계은행 등이 구제금융의 댓가로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리해고, 비정규직 양산, 기업에 대한 규제 개혁, 금융 개방 등의 문제에 있어 너무 손 쉽게 항복 선언을 한 바 있다. 97년 겨울 소위 ‘역사적 정권교체’를 통해 당선된 김대중 정부는 당장이라도 나라가 뒤집힐 것처럼 겁을 주며 국민 모두가 나서서 스스로를 희생하고, 임금이 깎이거나 직장을 잃는 것도 감수해야 하며, 나라를 위해 사소한 금덩어리도 모아 나라의 빚을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거나 임금이 깎이고, 불안정한 노동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초국적 금융자본과 정권의 으름장에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속아넘어갔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그리스의 시리자처럼 IMF와의 구조조정 계획은 재협상해야 하며, 그 협약은 위기를 민중에게 전가시키는 나쁜 방안이라며 철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었다. 그러나 거의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소수였고, 당시 최초의 정권 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정부의 뒷배에 올라타 ‘정의로운 신자유주의자’로 돌변한 386세대 정치인들은 둘째치고 여타의 진보진영, 민중운동진영에서도 그러한 요구를 전면화할 생각을 품지 못했다. 실제 그것을 내세웠더라도 입장을 통용시키고 대중적인 저항을 조직하기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냐 국가부도냐며 으름장을 놓는 지배세력에 맞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무방비 상태였다.

이후 우리는 끝없는 추락의 시간, 학생운동도 노동운동도 민중운동도 하나같이 위축되는 시련의 15년을 보냈다. 당시 IMF는 온 국민이 힘을 합쳐 극복해야 할 시련이었지, 누군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지만 이미 우리의 삶 곳곳이 피폐화된 이후다. 비정규직은 늘어났고, 노동운동은 끊임없이 탄압 당하는 가운데 미래를 준비하지 못 했으며, 조직률은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다. 대학 역시 구조조정의 파도에서 한 시도 자유로운 적 없었다.

▲ 25일(현지시간) 치러진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이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시리자 대표 알렉시스 치프라스(40)가 아테네 대학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주먹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금융위기와 추락하는 삶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터진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국내 경제를 포함한 세계 전반의 경제는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은 2008년 말부터 6년간 약 2조 달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한화로 약 2200조 원)을 미국 연준의 양적완화로 쏟아부어왔다. 중앙은행이 민간금융기관의 모기지 채권을 사들여 시장에 돈을 푸는 것이다. 은행들이 줄도산 위기에 쳐하자 이렇게라도 살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금융자본의 위기는 어느 정도 안정화 국면에 들어서고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점점 추락하고 있다. 실업이 만성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구직 자체를 포기해버렸고 물가는 올랐지만 실질임금은 늘어나지 않은 탓에 우리의 생계는 점점 쪼들리고 있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삶이 더 이상 나아질 것을 기대하기를 포기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자살 1위, 산재사고 1위, 노동시간 1위라는 끔찍한 오명을 뒤집어 쓰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스스로를 혹사시켜온 끝에 IMF를 극복했다. 그러나 비정규직과 양극화라는 재앙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반면 그리스 민중들은 18년 전의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구제금융 재협상, 구조조정에 대한 거부라는 카드를 택하고, 전후 유럽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은 미국 노동자들에게서 삥 뜯은 연준기금으로 자신들의 부실채권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연말마다 보너스 잔치를 열고 있다. 한국이라고 다른가? 지난해 삼성 갤럭시가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하고 삼성은 위기를 맞이했지만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 3남매는 유가증권 상장만으로 수 조원의 불로소득을 거머쥐었고, 고위 임원들의 보너스 잔치는 지속되었다. 여러 계열사에서 인원 감축을 감행했고, 삼성테크윈 등 4개사는 하루 아침에 매각해버렸으며, 삼성전자서비스에선 하청 노동자들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지만 저들만의 잔치는 계속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삼성전자 1차, 2차 부품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일자리마저 잃고 공단을 전전하고 있다.

치열한 준비, 과감한 도전

우리의 삶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결코 우리의 탓이 아니다. 노동은 불안정하게 만들고 노동의 댓가를 거머쥔 채 모든 과일을 독식하고 있는 자본가들과 고위 관리자들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저 그리스 민중들처럼 ‘다른 미래’를 상상하고 선택할 권리, 대안적인 정책들을 제시하고 관철시키는 힘이 우리 자신, 사회운동에게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에게 그리스나 스페인 같은 위기 찾아왔을 때, 우리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 봤을땐 요원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조직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 그리스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은 10여 년 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사회운동의 전통 속에서 이러한 준비를 해왔다. 오랜 내핍 상태 속에서 절망해온 그리스 국민들이 파시즘 대신 급진 좌파라는 전후 유럽 역사상 초유의 사건을 만든 것은 그들이 매우 합리적이며 준비된, 대안-정치세력이며, 치프라스가 젊은 패기 뿐만 아니라 통합적이고 열린 태도를 견지하는 리더라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시리자는 전술적으로는 유연하며 시야는 유럽 최남단에서 전 유럽대륙을 살필만큼 국제주의적이었고, 중장기적 전망에 있어선 ‘다른 세계’로 이행해나가겠다는 상상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의 지배권력은 끊임 없이 자신의 위기를 지연하며 노동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아 왔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빼앗음으로서, 비정규직은 더 극심하게 착취하고 정규직은 비정규직화 함으로써, 가스와 전기, 수도, 발전, 철도 등 공공부문은 민영화하거나 구조조정함으로써, 그리고 주택시장으로 돈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다시 증권화하는 과정을 통해 체제의 위기를 우리들에게 전가시켜왔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마냥 지속되기만 할 순 없을 것이다. 자본 스스로 위기를 지연시키며 모순이 극심해지고 있기에 언제든 심각한 상황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런 위기 국면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절망 대신 희망, 위기의 댓가가 국민들에게 전가되지 않는 길을 택해야만 한다.

상황은 긴박하지만 주체적인 조건은 미비하다. 절체절명의 시기, 새로운 리더십과 급진적이고 대안적인 이념과 정책을 제시하고 더 많은 대중들과 가까이 하지 못하는 한, 여전히도 진보정치는 ‘실력부재’라는 꼬리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구태를 갈아엎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겠지만 분열하고 우왕좌왕하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반복해선 희망이 없다. 치열한 ‘준비’와 과감한 ‘도전’이 불가피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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