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의 마지막 날. 나는 노동조합 사무실 혹은 그 어디쯤에 있었던 것 같다. 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쁜 기억은 으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날 밤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천안센터의 한 젊은 조합원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그런 일은 어딘가 나와 동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 10여 년 전 대학 새내기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무현 정권 1년차 어느 때보다 많은 노동자들이 파견법 개악, 정리해고, 노조탄압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고, 나는 넋이 나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불과 한 달 전 대구 칠곡센터에서 과로사로 한 조합원을 잃은 후라 더더욱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그의 이름은 최종범이었다. 돌도 되지 않은, ‘별’이라는 이름의 어린 딸을 둔 젊은 노동자였다. 노동조합을 만든 지 이제 막 100일 남짓이 된 전국 곳곳의 삼성전자서비스 AS노동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사이 두 명 조합원, 그것도 젊은 노동자를 잃었기 때문이다. 평균연령 40대 후반 금속노조에는 드문, 나보다 고작 두 살 남짓 많은 30대 초중반의 젊은 노동자들이었다.

▲ 최종범 열사와 그의 딸 별이. 딸이 태어났을때 그는 “이제부터 최종범 인생 끝! 별이아빠 인생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별이가 돌이 채 되지 않은 늦가을 어느 날 딸의 곁을 떠났다.

다음 날 사람들의 눈은 천안으로 쏠렸다. 천안에서 나고 자라 수년 전부터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에서 일해온 그의 삶이 드러났고, 그의 사체가 고향 마을 커다란 나무 아래 세워진 차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차 안에는 연탄불을 피운 흔적이 남아있었고, 닳고 단 백미러는 청테이프로 덕지덕지 고정되어 있었다. 수리비가 없어 임기응변으로 때웠기 때문이다.

급히 천안으로 내려갔다. 삼성전자서비스 박상범 대표이사는 이른 아침 화환을 보내 조의를 표했지만 노동자들은 그의 화환을 밟아 뭉개버렸다. 죽음으로 내몰 땐 언제고 이제와 조의를 표한다는 것은 너무도 기만적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그날 밤 금속노조는 고 최종범 님이 일하던 서비스센터 앞에서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이후 촛불집회는 그의 장례식이 치러진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매일 열렸다. 우리는 뭐든 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매일매일 우리의 무기력과 혼돈을 확인해야 했다.

당시까지 삼성 자본의 탄압은 경악스러울 만한 것이었다. 전에 없던 ‘감사’를 진행했고, 유독 조합원, 특히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감사를 진행했다. 4년, 5년 전에 있었던 몇 만 원짜리 실수에 대해서도 트집을 잡기 시작했고, 이를 빌미로 징계할 것이란 협박을 일삼았다. 이런 협박에 속은 몇 백 명의 노동자들이 실제 노동조합을 탈퇴하기도 했다.

최종범은 그런 협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틴 노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천안센터에서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만이 자신과 사랑하는 동료들의 삶에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 막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한 아마추어 활동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S그룹 노사문건’에 준하는 자본의 탄압은 여간해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실제 우리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서른셋, 청년 노동자 최종범이 제 목숨을 버렸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건 아무 말도 하기 어려웠다. ‘지역사회, 청년, 비정규직!’ 이런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우리들의 장황한 구호가 무기력해지는 순간을 느꼈다. 나와는 고작 두 살 터울인 노동자, 항상 소박한 꿈을 갖고 열심히 일해 온 죄 밖에 없는 노동자의 죽음 앞에 우리 사회는, 진보 진영은, 혹은 노조운동은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며칠 사이 많은 노동자들이 천안으로 모였다. 전국 곳곳에서 온 동료 AS기사들이었다. 삼성전자서비스에서 대규모로 노동조합이 조직된 이래 곳곳에서 탄압받고 있던 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했다. “너희들이 노조를 만들면 삼성이 가만히 있겠나” “삼성은 센터를 폐업하고 노조를 박살낼 것이다!” “너희가 하는 말 다 맞지만 삼성을 만만하게 보지마라”… 이런 무수한 협박, 돈과 실적을 들먹인 수다한 회유, 하루하루 끊이지 않던 악다구니를 죄다 버텨온 사람들이었다.

저마다의 얼굴마다 헤아릴 수 없는 회한과 상념이 느껴졌다. “종범아, 힘들었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 후 우리는 점점 말수가 없어졌던 것 같다. 당최 무슨 염치로 말하겠는가.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밤 천안의 삼성전자서비스 두정센터 앞에서 촛불 문화제가 열렸다. 전국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모였고,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소속의 정치인들도 모였다. 은수미, 우원식 의원 같은 이들 말이다.

은수미 의원이 마이크를 잡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은수미! 은수미! 은수미!” 많은 노동자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며 박수치고 환호했다. 실제로 인간으로서의 은수미는 존경할만한 사람일지 모른다. 국회의원이라는 딱지를 붙이고도 그는 항상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어느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삼성 자본의 노조 탄압으로 자결한 이래 모인 그 자리에선 복잡한 상념들이 단순하게 정리되기란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 정치권력과 자본은 노동자들을 더 쉽게, 유연하게 고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개발해왔다. 그 가운데에는 김대중 정권 시절 통과된 정리해고법도 있고, 노무현 정권 시절 그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던지며 반대했음에도 통과된 파견법 개악도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의 실력부족으로 그것들은 통과되었고, 그 결과 많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의 굴레에 빠지고 말았다.

헌데 이런 상황에서 분노하고 투쟁에 대열에 선 노동자들이 민주당 국회의원의 이름을 연호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진보정치, 노동자운동은 대체 무엇을 해왔단 말인가. 거꾸로 흘러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누구보다 앞장 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보수야당 정치인의 이름을 연호하는 모습을 넋 놓고 지켜봐야 하는가.

이건 명백한 실패였다. 노동당, 정의당, 녹색당, 노동자계급… 우리가 만난 조직된 노동자 중 누구도 그것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하는 주체는 없었다. 내가 깨달은 단 하나의 사실은, 우리가 정말, 보잘 것 없이 추락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되고 투쟁하는 노동자들로부터도 인지되지 못한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날 밤 최종범의 동료들은 삼성전자서비스 센터 연좌 농성에 돌입했다. 젊은 비정규직 AS기사의 죽음을 불러온 표적 감사와 노조 탄압에 대해 이재용 부회장이 사죄할 때까지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CCTV는 가리고 감시자들은 내쫓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행동이 참으로 무모했지만,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건이 몇 달간의 무기력한 탄압을 반전시킬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견을 밝혔다. 향후 며칠은 농성을 지속해야할지, 혹은 이 무모한 행동을 중단해야 할지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것에 놓여 있지 않았다. 노동자운동 스스로 보수야당이 노동자운동의 대체할 수 없는 저항을 대리하는 풍경을 그대로 둘 수 있느냐가 진짜 문제였다.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계급이 스스로의 실력을 키울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여겼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오늘날 노동자운동이 그것을 대체할 어떤 정치적 상징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번 겨울 프레스센터 옆 서울신문 전광판 고공농성을 전개했던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투쟁이 승리로 끝나고 두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땅으로 내려온 이는 누구였는가. 신임 민주노총 위원장도 있었지만 그들 옆의 유일한 정치인이 다름 아닌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었다는 사실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들의 투쟁 과정 속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신자유주의 정치 개혁과 양당제 정치 질서의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치인이라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이것이 대안 사회에 대한 정치, 항상 A 아니면 B를 택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 우리 사회 노동자들에게 강요된 선택지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고착화되고 불가피한 상황처럼 다가오고 있다. 문제는 그런 정치 공백을 대체할 실력도, 대안도 없는 좌파가 그것에 대해 아무 할 말도 없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진보정치, 사회운동이 일본처럼 노회하고 회복 불능한 것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외면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이다. 하기에 나는 좌파가 공허하게 자기 자리만 고수하며 자신의 공허한 주장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무엇을 어필할 수 있는지, 어떤 프레임에서 정세를 응시해야 하는지를 직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우회하고 주관적인 ‘옳은말’과 혁명적 언사를 늘어놓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농밀하고 진정성 있게 조직되어있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 접근하느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박근혜 정권에 대해 흔히 비판하듯 좌파 역시 리더쉽도, 조직이데올로기도, 정치도 없는 상태도 지속되고 있다. 요컨대 오늘날 지배계급이 마주하고 있는 정치의 위기는 좌파 혹은 사회운동 역시 동일하게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민교육이나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 두더지들의 소규모 결집들의 네트워크론 등이 횡행하는 이유다.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고 토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희망과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삼성 자본과 이재용 부회장의 무자비한 탄압, 사회와 여론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악조건조차도 슬기롭게 잘 견딜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 그것을 뛰어넘는 실력이 있었다면 최종범이 죽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죄의식을 갖고 싶진 않다. 어차피 나는 나쁜 기억은 잘 잊는 편이다. 그럼에도 뼈저리게 곱씹어보는 것만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운동 안팎의 공백과 모순들이 안타까운 죽음들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토대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더 광범위하고 파급력 있게 희망의 근거들을 쉴새없이 만들어야 한다. 짜여진 선택지를 넘어선 노동자들의 대안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우리는 최종범이라는 한 노동자가 죽고 50여일이 지난 후에야 그의 장례를 치룰 수 있었다. 경찰의 민주노총 건물 침탈로 연행되어 유치장에 있다 48시간 만에 나온 그날이었다. 얼마 후 촬영했던 사진들을 정리하던 나는 우연히 그의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죽기 일주일 전 민주노총 주최 비정규직 노동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까지 올라왔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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