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때문에 한동안 휴직했던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 분)는 증상도 어느 정도 나았고 생계도 유지해야 하니 다니던 공장에 복귀하려 한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난관에 부딪힌다. 회사가 그녀의 복직을 허락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회사로 찾아가 사장인 뒤몽 씨를 만나지만 그는 다른 직원들이 그녀의 복직 대신 ‘보너스’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물론 이는 직원들에게 그런 선택지를 강요한 원인 제공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한 답이다. 산드라의 항의와 애원에 그는 “정 원한다면 다시 무기명 투표를 하겠다”고 약속한다.

산드라는 재투표까지 남은 ‘1박2일’ 동안 (이 영화의 원제는 Deux jours, une nuit 이다) 동료들을 만나야 한다. 그들이 성과급 1천 유로 대신 자신이 해고되지 않기를 선택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아이러니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 (사진=포털사이트 다음 영화정보)

“네가 보너스를 포기하면 내가 해고되지 않을 수 있어”

그녀는 1박2일 동안 동료들을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야 한다. 신경질적인 우울증 환자인 그녀에겐 너무도 끔찍한 여정이다. 친했던 동료 셋은 전화통화만으로도 그녀의 편에 서겠다고 약속하지만, 이후의 만남은 전혀 녹록치 않다. 처음 찾아간 윌리는 그녀의 상황을 듣고 안타까워 하지만 딸의 기숙사 비용과 집세를 걱정하는 부인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다음으로 찾아간 미레유는 보다 냉정하다. 이혼 후 가구들과 가전제품을 사야하기 때문에 1천 유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만남들에서 관객은 점점 더 그녀의 상황 속에 개입하게 된다. 희망을 품고, 또 절망하며 잔혹한 아이러니에 깊게 관여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무수한 정치적 간극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산드라의 힘겨운 여정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의 분열과 갈등, 그 구체적인 감정의 면면을 본다. 영화는 어떻게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 과정을 산드라라는, 자기 혐오가 강한 히스테리증적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가 감정정으로 그려나간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여정에서 만나는 동료들의 대응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갈등한다. 때로 벌어지는 폭력적인 상황은 영화를 첨예한 긴장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 때문에 산드라는 아무래도 자기 자신이 이런 상황을 만든 버러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의심한다. 그녀의 남편은 “당신이 아니라 회사가 만든 상황”이라며 위로하지만, 그녀 스스로 이런 우울을 빠져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

산드라가 휴직하는 사이 회사는 어떤 ‘효율성 강화’의 틈을 발견했다. 17명이 아니라 16명이 일해도 충분히 생산과 노무관리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나머지 16명의 노동자들은 더 쉴 틈 없이 일해야 하고, 초과노동마저 감수해야 한다. 줄리앙은 이런 자본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인물이다.

“솔직히 말해볼까? 공장이 16명만으로도 돌아갈 수 있는데 왜 널 해고하지 않겠어?”
“하지만 줄리엣이 말하기론 일주일에 3시간씩이나 더 일해야 한다며?”
“맞아. 그치만 돈을 더 주는걸?”

17명이 일하는 작은 태양열 발전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분열하고,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자기파괴적인 상황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부당대립에서 산드라는 보너스를 포기해달라고 부탁하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빚도 갚고 생활비도 마련해야 하는 다른 동료들은 산드라에게 좀 더 뻔뻔해져야만 한다. 물론 한 동료는 산드라를 보자마자 펑펑 울면서, 지난번 투표에서 산드라의 해고(=보너스)를 택한 자신이 가졌던 죄책감에 대해 털어놓기도 한다. 동료를 ‘죽이는’(해고) 선택을 했던 노동자조차 스스로를 파괴하는 죄의식을 품었던 것이다. 반면 계약직 노동자인 알폰세는 보너스가 아니라 동료들이 무서워서 선택하기가 어렵다며, 이를 빌미로 회사가 계약연장을 하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난 11월 2천여 명에 대한 정리해고가 유효했다는 대법원 판결로 6년의 싸움 중 가장 어려운 순간에 놓이게 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대법원은 2009년 쌍용자동차의 고의 부도와 회계 조작 등에 대해 무수한 근거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2심 판결을 엎고 정리해고가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2014다20875) 76일 평택공장 옥쇄파업 시기 자본은 적극적으로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며 정리해고로부터 살아남은 자에게나 떠난 자에게나 고통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해고는 이처럼 자본의 이윤 획득을 위한 수단이지만, 오히려 뭉쳐야 할 노동자들이 죽고 죽이는 기괴한 형식을 갖춘다.

▲ (사진=포털사이트 다음 영화정보)

차가운 비판, 따뜻한 시선

산드라의 모습은 다르덴 형제의 전작인 <로제타>(1999) 속 ‘로제타’의 끈질긴 생존본능을 닮기도 했고, <로나의 침묵>(2008)의 히스테리컬한 ‘로나’의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영화들 안의 인간은 자본이 파괴해나가는 일상 한 가운데에 놓인, 고립된 인간의 자화상을 드러내는 일관성이 있다. 벨기에나 한국이나 노동자들이 마주한 현실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새해 첫날 개봉한 <내일을 위한 시간>은 1996년 데뷔한 이래 <로제타>, <아들>, <더차일드> 등 걸작들을 선보여온 벨기에 출신 영화감독 다르덴 형제의 신작이다. 프랑스어권인 왈롱지역 노동자계급이 그들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다. 서유럽의 조용하고 외딴 도시에도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몰아치고 있다. 환경의 극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의 삶과 그 감정이 어떻게 치달을 수 있는가를 아무 배경음악도 없이 따라가는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작은 에피소드만으로 체제 전체를, 깊게 드러낸다. 형식적으로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보다 현실의 문제에 천착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몰락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다루며, 우리를 짓밟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차가운 비판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정치적인-영화’

평론가들은 켄 로치에 대해 말할 때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좌파 영화감독”이라고 말한다. 물론 실제로는 더 많은 감독들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노동자계급의 문제에 대해 다루면서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작가는 찾기 힘들다는 의미일 게다. 그러나 지배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또 우리의 삶 속에 스며 들어오는지, 그래서 다시 우리는 관계맺음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야말로 급진적인 시선과 문제제기를 다루는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게다.

그들은 소재로서는 ‘정치’를 다루지 않지만,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상과 관계맺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누구보다 ‘정치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최근에는 더 극심해지는 절망적 현실에서도 낙관하며 계속해서 다시 시도해야 하는, ‘버티는 삶’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자꾸 허무와 절망의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은 위한 시간>은 오늘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화다. 특히 아트영화를 접하기 어려운, 고급의 문화자본을 취할 금전적인 여유도, 시간도 허락되지 않은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케팅 예산도 미미한 이 영화를 전국의 40개 남짓의 영화관들에서만 볼 수 있다. 상영이 허락된 시간도 하루 한 타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시간’을 지배하고, 영화시장마저 독점한 대자본 때문이다. 이런 구도를 균열시키지 않는 한 이런 영화들은 ‘정치적인 것’의 힘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선 버텨내야 한다면, <국제시장>에 대한 무수한 말들의 범람에 한마디 더 보태기보다 한번이라도 이 영화를 보고 영화가 침범한 현실의 아이러니를 공유하는 편이 훨씬 유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쌍용차 공장 안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함께 이 영화를 볼 날을 꿈꾼다.

▲ 한국 개봉 포스터. (사진=포털사이트 다음 영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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