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에게 좀 그럴듯한 출구전략은 없는걸까? 갈팡질팡하며 스스로 사안을 키우고 있는 카카오의 모습이 자못 안쓰럽기까지 하다. 담당변호사까지 나서서 안 그래도 성난 대중의 분노를 키웠으니 말 다 했다. 사적인 대화 내용들을 일주일씩 남겨놓다가 2~3일만 서버에 남기겠다는 ‘대책’도 면피를 위한 궤변으로 들린다. 서버에 저장해두는 시간을 줄인다 해서 거침없이 들어오던 압수수색 영장이 안 들어가겠는가? 이 나라 공안당국의 몰지각한 ‘게슈타포’들은 철야근무도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 노력을 다 해서라도 영장을 집행할 것이다. 오히려 대응력만 키울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루 온종일 시도 때도 없이 친구들과 대화하던 ‘놀이터’가 뒤집혔는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론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지붕이다. 모두가 다치지 않는, ‘안전한’ 출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방도 텔방으로 옮기시죠?"

이대로는 추락세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텔레그램 채팅창이 익숙하지도 않고 귀엽고 깜찍한 이모티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단체카톡방들이 텔레그램으로 옮겨오고 있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경우 가히 SNS노조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조직 내의 소통에 있어서 카카오톡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전국 곳곳에 흩어진 서비스센터들이 하나의 분회를 이루고, 또 각 영역마다 간부들의 방이 있으니 그럴만도 했다. 정확히 가늠이 되진 않지만 분회별 조합원방과 간부방, 지역별/권역별 간부 방 등 100개는 족히 넘었다. 그런데 이 방들이 ‘조직적으로’ 망명을 떠났다. 삼성에서 어렵게 만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민주노조인데 보안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십 개의 방들이 통째로 ‘망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카카오톡에 대한 도덕적 힐난을 보내는 이용자들도 많다. 카카오톡에서 자신의 사생활이나 사적 대화, 지인들과의 소통의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었던 사실만이 아니라도 카카오톡이 지녔던 친근한 이미지와 생활밀착가 이런 배신감을 안겨주는데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이모티콘을 구매하는데 상당 금액을 투자한 사람들은 졸지에 투자금을 날린 피해자가 돼버렸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도 대거 이동하고 있다. 대부분이 아직 카톡과 텔레그램을 병행 이용하고 있지만 조만간 대이동이 완료되면 카톡을 완전히 탈퇴하겠다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 다음카카오 이석우 대표는 지난 13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메신저 카카오톡에 대한 수사당국의 검열논란과 관련해 대책을 발표하고 고개숙여 사과했다.(사진=연합뉴스)

아무리 대표가 나서서 읍소를 하고 밤잠을 못 이뤘다고 징징거려도 곳곳에서 ‘망해도 싸다’고 말할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졌다는데 어쩌겠는가. 다음카카오의 창립 멤버들과 경영진은 한국사회의 미디어와 IT시장을 뒤흔들며 등장해 정치적 이슈로 등극하며 위기를 맞이한 이 파란만장한 SNS사업을 때려칠게 아니라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 출구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불가능한 ‘마이라이프’

물론 오늘날 카카오에게 향해지는 비판들은 억울한 측면이 있다. 정보인권과 사생활 보호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의지도 없는 자들이 권력을 쥐고 모든 것을 어그러뜨리며 들쑤시고 있으니 ‘일개’ 기업 입장에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미 거대한 사업체가 된 카카오가 아무리 정의의 사도가 된다한들 악법의 칼날을 들이미는 정치권력을 맞설 힘은 없다.

감청에 대해선 거부하고 이외의 압수수색 영장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한 카카오로서는 당장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선 최대한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권력에 의한 감시와 기업화된 유사-국가감시의 억압적 시스템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 전기통신사업법, 형사소송법 등을 아우르는 대한민국의 개인감시망은 매우 촘촘하다. 전기통신의 감청은 비교적 엄격한 요건으로 통제되는 반면, 전자우편이나 모바일메신저 등에서 송수신이 완료된 메시지의 경우에는 일반 압수수색을 통해 매우 ‘원활하게’ 털릴 수밖에 없다. 압수수색의 과정에서 당사자의 참여나 알 권리를 보장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공안당국은 영장도 없이 개인의 통신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고 문서 상에는 “수사 상 필요”라는 동어반복적이며 자의적인 문구만 적으면 그만이다. 법이 정한 절차적 규정 자체가 엉망진창인 것이다.

헌데 감청에 대한 법원의 판례는 감청의 개념과 대상을 “송수신의 현재성과 동시성”이라는 엄격한 요건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감청영장의 엄격한 요건이 적용되는 범위는 축소되고, 되레 보다 완화된 요건의 압수수색영장이 적용되는 범위가 커진다. 결국 카카오톡을 비롯한 모든 통신정보의 수사기관 취득은 무척이나 손쉽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인간관계와 지난 밤의 솔직한 대화, 사적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사연들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나의 대화가 공안기관의 손에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상황에 대해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국가 혹은 자본이라는 ‘빅브라더’의 노예들이다.

더군다나 카카오는 이런 시스템에 무력하게, 혹은 무책임하고 기만적으로 우리의 ‘삶’을 드러냈고, 이런 사실을 당사자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면 스티콘을 팔아먹을지, 시장의 아주 작은 공간조차 잠식해 어떻게 플랫폼을 확장할지, 요컨대 얼마나 빠르게 온라인화된 인간관계라는 거대한 시장의 괴물이 되어 이윤을 늘릴 것인가에 대해서만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네이버나 네이트라고 해서 좀 더 나았겠는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진 않았다. 문제가 단순히 카카오라는 한 기업의 안이함을 넘어 자본과 권력의 협작으로 이루어지는 구조적 모순 속에 놓여있음을 우리는 알고있다. 기업에 의해 개인정보에 대한 수집과 분석이 이루어지고 이용자를 프로파일링하는 시스템은 새로운 ‘윈도우’마다, 팝업창마다 세워져있다. 이는 엄연히 신자유주의 금융화 이후 다시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감시이다. 정보가 곧 삶이 된 시대, 이용자 개인에 대한 감시를 넘어 이용자 프로파일링 데이터를 소유한 기업과 국가가 협력하는 것이다.

천기누설! 카카오프렌즈의 출구전략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는 ‘이래저래 불가능한’, 사방이 함정으로 둘러싸인 총체적 난국을 목격하고 있다. 혹자는 이 모든 것이 정권교체라는 마법 한 큐에 원상회복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시사회 구축을 위한 이 모든 모순들은 그리 간단한 해법으로 풀릴 수 없다. 자본권력에 의한 구조조정과 삶의 파괴 이후 철저하고 혹독하며 표리부동한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억압 없이 시스템을 수호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폐해로 세월호 참사와 자살의 급증, 각종 공공재의 영리화라는 ‘파괴’가 행해지고 있지만 자본과 보수 정치권력은 이런 비극들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을 결코 고칠 생각이 없다. 자신들의 이윤 획득 수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찰력을 증가하는 등 치안국가적인 면모를 강화하고 감시를 내재화함으로서 성벽을 더 튼튼하고 높이 세우려 할 것이다.

거대자본 다음카카오는 대중운동의 주체도 아니거니와 이런 모순에 구태여 관심을 가질 생각조차 없을 것이다. 다음 창업주 이재웅은 짐짓 386의 얼굴을 하고 약자 운운했지만 여지껏 시장화된 인간관계망의 토대 위에서 기세있게 장사질을 해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적어도 균열이 나기 시작한 이 난국에 강력한 한 방, 자신들에게 어마어마한 이익을 안겨다준 대중들에게 자신의 삶을 수호하면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호기로운 싸움에 나설 수 있도록 든든한 안내자 혹은 은혜갚은 까치가 되는 기적적인 실천의 길은 있다. 바로 카카오톡이라는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 자체를 공공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물론 자력으로 성장해서 이제껏 카카오톡을 키운 이들은 콧방귀를 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장치’가 사회의 모든 언로와 미디어, 이데올로기를 장악하는 시대에 SNS는 도구이기도, 상품화된 ‘마을회관’이기도 하다. 누구나 만날 수 있지만 들어가면 우리를 유혹하는 온갖 상품들이 진열돼 있다.

카카오톡은 채팅을 넘어 스티콘을 통한 매개 역할을 하면서 게임과 뉴스, 쇼핑, 음악, 패션, 웹툰을 아우르는 종합 플랫폼이 되었다. 이제 그것을 다시 대중들에게 돌려주고 철자하게 사회화함으로써, 자본과 국가권력에게 장악당한 상황에서, 숨 쉴 틈을 제공한다면 카카오톡은 다시 신뢰받고 제 이름 값을 할 수 있을 게다. 방법을 몰라 문제겠는가? 문제는 항상 거머쥔 이들의 탐욕일 뿐이었다.

법만으로는 당연히 한계적이다. 기업이 시작한 SNS에 대한 사회적 관리 체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대중운동의 힘에 근거한 실천들이 필요하다. 더불어 우리는 전기통신의 검열과 사찰에 관한 시민사회 일반이 주체에 선 통제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해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나가야 한다.

▲ 홍명교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교육선전위원

소비하는 이용자에서 통제하는 주체로

한때 우리는 네이버라는 괴물에 도전한 자생적이고 창의적인 신생기업 카카오의 신화에 찬사를 보냈던 바 있다. 카카오가 시장에서 신선한 아이템을 내놓고 기하급수적인 성장가도를 달리는 것을 이종격투기 관람하듯 지켜보기만 했고, 충실하게 소비하고 열광적으로 이용하는 유저로서만 우리 스스로를 위치지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소비주체는 자기자신의 삶의 기록에 대해서조차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두 괴물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동안 우리 각각의 삶은 끊임없이 후퇴되고 있었던 것이다. 카카오톡을 시민에게로 환원하고, 소비하는 유저에서 통제하는 주체로 우리 스스로를 조직할 때 카카오가 맞닥뜨린 총체적 위기 역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
《긴급토론회 사이버 정치사찰과 국민감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자료집 中
이호중(서깅대 법학전문대학원), '사이버 상의 전기통신에 대한 사찰과 감시 - 문제점과 법제도적 개선방향'
강정수(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기업에 의한 감시사회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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