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창밖이 시끄러워졌다. 정동 골목 초입에 일군의 시위대가 나타나 굉음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마이크를 잡고 선동하는 남자의 말투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이었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건너편 일민미술관 앞에 가판을 차리고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운동에 대해 근거 없는 힐난을 쏟아내는 그 남자였다. 너무 독특한 억양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단번에 기억났다.

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 무슨 일인지 살폈다. 검정색 조끼를 입은 젊은 남자들과 평균연령으로 족히 70세는 넘어보이는 일군의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의 극우언론 산케이신문의 서울총국이 있는 경향신문사 건물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모욕적 기획 기사에 대해 사죄하라는 요구를 담은 기자회견을 진행 중이었다. 검정 조끼에는 ‘한겨레청년단’이라고 적혀있었고 대부분 3~40대의 남자들이었다. 노인들은 가만히 서서 걷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로 연로한 이들이었다. 그 노인들은 우리가 아는 ‘어버이연합’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한겨레청년단 소속 청년의 발언. 그는 극우주의자들의 집회에서는 보기 드문, 뛰어난 연설가다. (사진=홍명교.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마이크를 든 남자는 조롱하는 말투이면서도 선동적이었고 기세가 있었다. 예전의 극우파 선동가들이 보이던 구태의연한 문구는 아니었다. 즉자적이었고 에너지틱했으며 이러저러한 근거들이 있었다. 나는 그가 좀 다르다고 생각했고, 그 옆의 다른 멤버들에게도 눈길이 갔다. 어떤 남자는 덩치가 크고 다혈질이었고, 또 어떤 남자는 냉정하게 카메라만 들고 돌아다녔다. 또 다른 한 남자는 경찰 측과의 조율을 맡기도 했다.

그때 마이크를 들고 연설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건물 쪽으로 돌진했다. 그는 산케이신문에 쳐들어가서 담당자와 면담을 하겠다고 했다. 결국 경찰의 벽에 가로막히긴 했지만 그는 이리저리 날렵하게 뛰어다녔다. 마치 광기어린 몸짓으로 두더지잡기 게임을 하는 터프한 취객처럼 말이다.

탈북-극우-청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들에 대해 궁금했다. 얼마 전 논란이 된 서북청년단 재건위가 말장난이라면 이건 악몽 같은 진담이었다. 다음 날과 지난주 금요일에도 그들은 나타났고, 그리고 또 다음 주에도 그들의 ‘투쟁’은 예고돼 있다. 물론 처음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논란에 대해 언급했던 조선일보사 앞에선 왜 시위하지 않느냐고 비아냥댈 수도 있겠지만, 그런 대응은 작금에 몰아닥치는 지속적인 ‘우경화된 풍경’을 응시하고 비판하는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얼마나 저급한가에 대해 떠드는 것이 아니라, 대체 한국사회에 그런 사람들이 왜, 어떻게 해서 발생했느냐이다.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으로의 진입을 막는 경찰에 항의하며 연좌 농성 중인 어버이연합과 한겨레청년단 소속 회원들. (사진=홍명교.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한겨레청년단은 지난 10월3일 출범식을 통해 만들어진 단체다. 일부 극우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들은 “대한민국 애국청년들과 북한 이탈주민 출신 청년들”로 이루어졌으며 ‘반공’과 ‘통일운동’을 핵심과제로 삼고 있다. 출범하던 날 그들은 노인 50여명을 일민미술관 앞에 앉혀놓고는 “그간 한국전쟁의 당사자였던 어르신들께서 고생 많이 하셨다”며, 앞으로는 그들 청년들이 나서서 이 땅의 빨갱이들을 색출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무수히 듣던 얘기다. 30대 청년이 키치적인 퍼포먼스를 상연하며 끔찍한 멘트를 날렸다고 해서 특별히 다룰 이유는 없을 게다. 흔하디흔한 독설 아닌가. 문제는 그들이 북한에서 탈주한 이주민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종종 종합편성채널에 나와 궤변을 늘어놓는 안보강사도 멤버들 중 하나다. 여느 보수 집회나 보수정치인들의 선거 유세에 등장하는 청년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고 동원된 모양새가 강했다. 그런데 이들은 달랐다. 자신들만의 단단한 신념으로 뭉쳐 있었고, 그 신념을 위해선 뭐든 할 것처럼 행동했다. 어버이연합 어르신들에게는 깎듯한 예의를 보였고 산케이신문으로 가는 자신들의 길을 막는 경찰 앞에서는 거침없이 ‘투쟁’했다.

▲연설 도중 마이크를 던지고 경향신문사 건물로 돌진하는 남자. 10월 7일 낮. (사진=홍명교.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은 탈북이주민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그를 설파한다. 그들은 북한 주민의 참혹한 삶과 김정은 정권의 무능함을 주장하기에 설득력 있는 증인들이다. 지배자들로부터 억압받던 이들의 목격자로 전하는 말이니 굳이 거짓말을 보탤 이유도 없을 것이다. 김일성 이래 3대 세습으로 권력을 지켜온 북한의 지배세력들이 민중의 삶을 얼마나 많이 파괴했는가를 부정할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일말의 판타지를 갖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증언들은 박근혜 정부의 공격적인 대북 정책을 옹호하거나 남한 사회의 사회운동에 대한 몽매한 조롱들에 활용되고 있다.

때문에 극우주의자들은 ‘종북 타령’을 멈출 생각이 없다.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을 우익 정치로 위장한 미디어로 안내하고 있다. 군대를 비롯해 일선 학교 등에서 열리는 각종 ‘안보의식 강화’를 위한 강연에서, ‘탈북 예능’을 표방하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나 각종 다큐멘터리, TV토론 등에서 거리낌 없이 ‘말’하는 탈북이주민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투쟁의 거리’에도 나타났다.

탈북이주자들의 무산일기

매스미디어에서는 수시로 등장하며 거리에 나와 정치적인 주장도 서슴지않을 정도로 상징성이 있지만, 2만8천여 명에 달하는 대다수 탈북이주민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탈북이주민은 정착하고 적응하며 삶을 영위하기가 누구보다 쉽지 않다. 북한에서 왔다는 사회적인 시선도 문제거니와 노동권의 측면에서도 더욱 열악하다. 지난해 말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탈북이주민들의 평균임금은 141만4천 원으로 국내 평균임금 261만 원의 절반에 미쳤고, 비정규직 평균임금인 140만4천 원과 거의 같았다. 탈북이주민의 절반 이상이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북한에 남아있는 한 탈북이주민의 가족이 남쪽에 내려간 가족의 생계가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생활비를 송금해오기도 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무산일기>는 이런 탈북이주민들이 겪는 차갑고 거친 노동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독립영화다. 3년 전 개봉해 평단과 소수의 관객들의 호평을 얻은 바 있다. 영화 속 탈북자인 ‘전승철’은 자신의 노동에 있어서 어떤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빈털터리다.

그러나 현실의 미디어와 정치는 이런 탈북이주자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에 무관심하다. 애초부터 한국사회는 몸뚱이 하나로 시작하는 제 2의 삶의 ‘노동권’을 위한 안전장치를 제공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요란하게 취업박람회를 열어 계약직이나 일용직 노동자의 길로 안내할 뿐이다.

▲ 영화 <무산일기(The Journals of Musan)>의 한 장면. 이 영화는 2011년 04월 한국에서 개봉됐다. 박정범 감독이 연출했다. (사진=포털사이트 다음 영화정보)

사회운동, 회피말고 연대할 때

돌이켜보면 갑작스레 정동길 앞에 들이닥친 ‘분노한 청년들과 노인들’에 대한 당황스러움은 필연이었던 것 같다. 시도때도 없이 종북 타령하는 극우파들의 조롱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 북한 문제에 대한 전략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보정당이나 사회운동진영의 오랜 무관심과 회피가 탈북이주자의 얼굴을 한 ‘극우 정치’를 낳게 한 건 아닌지 씁쓸할 뿐이다.

‘우리는 북한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다’라는 멘트만으로 알리바이가 채워질 순 없을 게다. 할 일은 많고 여력은 부족하지만 탈북이주자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권의 문제에 착목하고 먼저 다가가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국사회가 마주한 분단이라는 모순과 그것이 낳는 무수한 극우정치의 언어들, 또 그 언어가 만드는 거대한 혐오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선 남북한에서 제 몸 굴리며 일하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권리, 즉 권력자들이 착취하고 있는 나의 노동에 대한 권리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권리를 거리낌없이, 누구에게나, 또는 가장 열악한 곳에서 보다 빈번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탈북 이후. 아무리 TV에서 북한 독재정권의 참혹한 짓거리에 대해 대신 떠들도록 시키며 그것을 극우주의의 근거로 이용하려 한들 대다수 이주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탈북이주자들이 겪는 빈곤의 맨 얼굴은 ‘종북’이라는 절대적인 선동문구 앞에 가려지고 있다. 더불어 이들의 노동권과 삶을 옹호하고 지키기 위해 연대해야 할 주요한 세력은 의도치 않은 침묵과 운동의 고립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남북한은 오랜 분단의 역사 속에서 차이가 커진 만큼 사회병리적인 공통점도 생겼다. 남북한은 공히 이병철-이건희-이재용과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의 절대권력의 지배하에 노동권을 빼앗겼고, 민주주의는 파괴되고 위협받고 있다. 유사-인신매매마저 횡행하고 있고, 1대99의 빈익빈 부익부는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

이제 북한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언어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가 항상 우리의 삶과 노동, 혹은 한반도 전쟁위협의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 하듯, 탈북이주자들 역시 보장받아야 하는 그것에 대해 함께 말하기 시작할 때 ‘종북’이라는 허구적인 프레임도 자연스럽게 와해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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