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현옥] 여름 하늘을 지나는 구름이 해바라기 곁에 잠시 머문다. 어쩌면 구름은 해바라기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당신의 사랑을 잠시 내려놓아도 됩니다. 당신의 마음은 이미 하늘에 닿았고, 하늘은 당신에게 사랑의 씨앗을 선물로 주었지요.’

구름 이야기를 들은 해바라기는 자기 가슴에 품은 씨앗을 소중하게 품으며 몸을 앞으로 숙인 것 같다. 북한강변에서 누구보다 많은 씨앗을 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해바라기를 보니 이런 장면이 연상 되었다.

지난밤의 거센 비바람도 해바라기의 뿌리까지 흔들지는 못하고 대부분 허리를 굽히고 있다. 몇 년 전 봉평에서 만났던 해바라기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래도 몇 그루는 이른 아침 찾아온 손님을 맞아 노란 꽃잎을 빛내며 인사한다.

해바라기에게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클리티에와 헬리오스의 전설이 있다. 클리티에는 헬리오스를 사랑했다. 하지만 헬리오스는 레우코노에를 사랑했다. 질투가 난 클리티에가 레우코노에의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여 그녀를 죽게 했다. 헬리오스는 이것을 알고 클리티에를 돌아보지 않았다. 요정들마저 그녀를 버리자 클리티에는 외롭게 굶어 죽고 만다. 클리티에가 죽은 자리에서 피어난 것이 해바라기라는 것이다.(출처:나무위키)

중국 사람들은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고 향일규(向日葵)라고 불렀다. 그런데 해바라기는 꽃봉오리가 벌어지기 전까지만 영양 흡수를 위하여 해를 따라 고개를 돌리고 꽃이 핀 이후에 꽃송이는 제자리에 있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모란과 함께 부를 상징하여 지금도 해바라기 그림을 집에 걸어 놓기도 한단다.

해바라기 (사진=조현옥)

원산지가 아메리카인 해바라기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뒤에 유럽에 전파되었고 황금꽃으로 불리기도 했다. 방사능 오염수를 정화하기도 하며, 영양 성분이 많은 해바라기는 멀리서 보아도 노란 꽃잎과 큰 잎이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는 고마운 식물이다.

그래서였을까, 생전에 화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채 외로운 삶을 살던 반고흐는 고갱을 기다리며 해바라기 그림을 그렸다. 고갱이 예술 동반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해바라기를 그린 반고흐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무척 행복했을 것이다. 고갱이 자신처럼 노란색을 좋아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쓸 방의 벽을 노랗게 칠하고, 해바라기 그림을 그린 액자 두 개를 벽에 걸어놓았다.

이렇게 탄생한 해바라기는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을 맞이한 후에도 고갱이 그 작품을 달라고 할 만큼 훌륭한 작품이었다. 힘 있는 붓 터치와 화사하고 섬세한 색감이 주는 반고흐 작품의 예술성이 살아있는 작품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행복한 마음을 갖고 그린 그림 속의 해바라기는 활짝 핀 꽃의 화사한 모습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노란 꽃잎을 잘 간직한 꽃과 약간 고개를 숙인 꽃, 시들어 꺾인 꽃도 있다. 어떤 것은 겉을 둘러싼 노란 꽃잎이 모두 떨어지고 씨앗만 품고 있는 것도 있다. 이것이 당시의 네덜란드 정물에 반영된 바니타스 정신이라고 한다.

바니타스는 인생의 유한성과 덧없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기억하며 방탕한 삶을 살지 말라는 경고라고 한다. 어느 미술평론가는 반 고흐 그림 속의 수많은 해바라기 씨는 끝없이 이어지는 생명력을 암시하며 반고흐에 의한 바니타스 정신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우리를 매료시킨 해바라기 그림의 매력이 바로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사하게 피어있는 꽃도 아닌데 그 안에서 느껴지는 힘과 깊이 있는 생명력. 결국 예술작품의 매력은 작가 정신이고 작품의 힘이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힘겨운 삶이었지만 반고흐의 예술적 혼은 현실에 지지 않았고, 작품 속에 살아서 꿈 바라기를 하다 지쳐가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김경미 화백 그림 (사진=조현옥)

올해 8월, 나는 특별한 해바라기를 만났다. 새로 근무할 학교 면접을 보기 위해 동탄에 있는 한 중학교를 찾았다. 신도시의 학교 면모를 갖춘 깔끔하고 멋진 외관, 물스밈성이 좋은 보도블록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태양광 에너지의 효율을 알리는 전광판이 눈에 띄었다. 이제까지 보았던 학교와는 다르다는 생각에 긴장감을 더한 채 면접실로 들어섰다. 따뜻한 인상을 주는 교감 선생님과 면접관을 보고 긴장했던 마음은 누그러졌다.

무사히 면접을 마치고 복도로 나오니 벽에 마주 걸린 커다란 해바라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과 주황빛이 담긴 꽃잎은 살아서 바람에 나부끼듯 활기차 보였고, 여느 해바라기 그림과 달리 중심의 두상화 부분이 노랑과 분홍, 보라색으로 섬세하게 그려져 마법 가루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림이 나를 격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여러 학생이 모인 학교에서 무한한 창의력을 자극하며, 학생 한 명 한 명의 꿈을 연상시키는 그림처럼 여겨졌다.

학교는 중등교육법을 준수하며 교육이 이루어지지만, 학교마다 여러 가지 환경의 차이가 있고 운영 체제와 교육 현장의 모습은 다양하다. 마흔다섯 살에 첫 담임을 맡아 교단에 섰을 때, 동료 교사들의 따뜻한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늘 했다.

그날 만난 해바라기 그림에서 받은 느낌대로 나는 보랏빛 씨앗에 꿈을 간직한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권위적인 모습 없이 따뜻하게 학생에게 다가가려고 배식 봉사를 하는 교장 선생님, 교육 경력이 많아도 늘 겸허한 마음으로 교육에 임하는 동료 교사들과 협력하며 교육 공동체의 사명을 다하고자 한다.

해바라기 (사진=조현옥)

반고흐가 꿈꾸던 화가 공동체는 없지만, 반고흐의 사랑과 희망은 그의 작품에 담겨 전해지며, 해바라기꽃을 보는 누군가는 반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떠올리고, 그의 그림을 보며 꿈꾸는 화가는 또 다른 희망을 품은 해바라기 그림을 그려 희망을 전할 것이다.

키가 큰 해바라기도 함께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아직 손을 잡고 함께하기 어려운 때이지만, 마음으로는 희망의 씨앗을 전하는 세상이길 바라며, 함께 서 있는 해바라기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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