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강남규 칼럼] 미국의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지난 18일 세상을 떠났다. 이미 전기영화와 다큐멘터리, 그리고 부고기사들을 통해 소개되었듯 그는 리버럴에게 최후의 보루 같은 존재였다. 대법원이라는 시험대에 오르는 진보적 가치들을 변호해 온 그를 미국의 리버럴들은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 그가 떠나며 손녀에게 남긴 유언이 있다. “나의 가장 강렬한 소망은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긴즈버그의 자리가) 교체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왜 세상을 떠나면서까지 이런 걱정을 해야 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미국 사회에서 대법관이 가진 강력한 영향력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미국 대법관들은 ‘9인의 현자’라고도 불린다. 단지 미국 전체에서 9명뿐인 대법관이라는 위치에 오를 만큼 현명한 사람들이라는 뜻일 수도 있지만, 지혜를 구하기 위해 현자를 찾아가는 것처럼 이들이 국민을 대표해 온갖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린다는 점에서 더 없이 적절한 별칭이다.

긴즈버그 미국 대법관 추모하는 촛불 [로이터=연합뉴스]

그렇다. 미국 대법관은 종종 정치적 이슈에 대한 최종 판단을 대리한다.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다. 많은 중요한 이슈들이 대법원에서 최종 승인됐다. 흑인 권리를 신장시킨 민권법의 제정, 임신중지(낙태) 합법화, 오바마케어의 승인, 동성결혼 합법화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를 반으로 가를 만한 중대한 정치적 갈등들이 대법원의 판결로 정리됐다. 이처럼 유권자가 직접 선출한 입법부가 아닌 사법부가 정치적 갈등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가 입법에 강제되는 현상이 바로 정치의 사법화다. 분립된 삼권에서 유일하게 유권자에 의해 직접 선출되지 않는 권력이 가장 큰 결정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사법화는 문제적인 현상으로 진단된다.

앞서 사례들이 보여주듯 미국에서 대법원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사회적으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입법부에서는 끊임없이 공회전하더라도, 대법관 9인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느냐에 따라 제도적 진전이 이뤄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9인의 구성은 우연적인 측면이 있다. 대선을 두 달 앞두고 사망한 긴즈버그의 경우는 이를 잘 보여준다. 공석이 생기는 시기의 대통령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대법원의 전체적인 성향이 뒤바뀔 수도 있는데, 이것이 오직 대법관 개인의 건강 상태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우연적인 것이다. 긴즈버그가 ‘새 대통령이 교체해달라’는 유언을 남긴 이유다. 다시 말해 우연의 결과로 한 사회의 큰 물줄기가 바뀔 수 있는 것이 지금 미국의 정치 지형이다.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에 대법원이 있다면 한국에는 헌법재판소가 있다. 미국 대법원과 마찬가지로 ‘9인의 현자’로 구성되는 기관이다. 최근 20년만 놓고 보더라도 헌재가 결정권을 행사한 정치적 이슈들은 미국의 그것들에 비해 결코 밀리지 않는다. 노무현‧박근혜 두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최종 판단했고, 행정수도 이전을 ‘관습헌법’의 논리로 무릎 꿇렸으며, 한 정당(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다. 국회에서 결정된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안도 헌법불합치로 돌려보냈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이른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논의를 급진전시킨 판결도 있었다.

어떤 판결은 행정부가 추진하고 입법부가 동의한 사안에 대한 것이었고(행정수도 이전), 어떤 판결은 입법부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으며(선거구 획정안), 어떤 판결은 행정부와 입법부가 미루는 동안 사법부가 개입한 것이었다.(낙태죄 폐지) 민주주의적 원리로 보자면 삼권의 최종심급에 사법부가 자리한 형국이다. 전형적인 정치의 사법화다.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입법부‧행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통해 입법을 선도해야 할 두 권력이 의미 없는 정쟁을 일삼으며 판단을 미루는 사이, 지쳐버린 국민들이 어느 쪽이건 시원하게 답을 내려주는 사법부의 결정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한편으론 법은 ‘제 잇속만 챙기는 정치’와 달리 공명정대할 것이라는 믿음도 여기에 깔려 있다.

그러나 과연 법은 공명정대한가? 우리는 법이 정치와 결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양승태 사법농단 사건’에서 익히 확인한 바 있다. 사법농단까지 가지 않더라도 법이 종종 기득권의 방향으로 기운다는 사실은 수많은 판례에서 확인돼 왔다. 헌법재판소는 객관적으로 구성되는가?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지명하며, 나머지 3분의 1인 세 명 중 한 명을 여당이 추천하는 헌법 구조에서 헌법재판소는 때때로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 예컨대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이 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을 지명함으로써 9인 중 6인이 진보적 성향의 재판관으로 구성됐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정치 성향이라는 것이 단순히 진보와 보수로 이분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법 역시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의 최선은 정치 자체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정치는 시민의 몫이고, 시민은 교체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교체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법부와의 결정적 차이다. 우리 편으로 채울 수 있을 땐 한없이 편리하지만 ‘적’의 편으로 채워졌을 땐 한없이 불리한 제도에 모든 것을 맡긴다면 우리의 정치는 언제나 뒷걸음칠 위험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지금 미국에서 긴즈버그의 빈자리에 강경한 보수주의자인 에이미 코니 배럿이 지명되어 임신중지‧성소수자 권리‧총기 규제‧오바마 케어 등이 모두 과거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미국 사회를 휘감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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