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오만한 180석 여당이 법치주의를 무너뜨린다” 뉴스타파가 이른바 ‘한만호 비망록’의 내용을 보도하고 더불어민주당 주요 인사들이 당시 수사에 대한 검찰의 재조사 필요성을 주장하자 보수세력이 꺼내든 논리다. 이제 우리는 법치 이전의 왕정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법치주의가 무너졌다고 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한명숙 전 총리 판결이 법에 의하지 않은 방식으로 뒤집혀야 한다. 그런데 법치주의 국가에는 대개 재심 제도라는 게 있다. 확정된 판결이라 할지라도 사실인정에 중대한 오류가 있다는 게 확인될 경우 심리를 다시 하는 제도다. 과거 독재정권이 법치를 무너뜨리고 강행한 여러 억울한 유죄 판결들이 이 제도를 통해 바로 잡혔다. 한명숙 전 총리가 재심을 청구하고 그 결과 판결이 뒤집히더라도, 법에 의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 법치주의가 무너질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20일 검찰의 강압 수사 비리 의혹이 제기된 한명숙 전 총리 뇌물수수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최근 공개된 고(故) 한만호 씨의 옥중 비망록 내용을 거론한 뒤 "이 모든 정황은 한 전 총리가 검찰의 강압수사, 사법농단의 피해자임을 가리킨다"면서 "한 전 총리는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지금도 고통받는데, (재조사 없이) 넘어가면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사진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2017년 8월 23일 경기 의정부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는 모습(연합뉴스)

한명숙 전 총리가 재심을 청구할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재심은 법령에 정한 사유에 한해 신청을 허용하게 돼 있다. 판결의 근거가 된 증거 등이 위변조 또는 허위인 사실이 증명된 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만호 씨가 뒤집은 진술은 법정에서 다뤄졌고 판결에도 반영됐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명숙 전 총리의 재심 청구가 인용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더라도 무죄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한명숙 전 총리가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단지 규모에 있어서 의견이 갈렸을 뿐이다. 뉴스타파의 후속보도 등이 이어지더라도 이를 뒤집을 증거가 제시될지는 미지수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한명숙 전 총리의 재심 청구에 어떤 실익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한만호 비망록 보도’가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검찰이 수사권을 남용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당이 재조사와 공수처 수사 대상을 거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명숙 전 총리 판결과 별개로 검찰개혁 문제를 제기하기에 알맞은 사례라는 것이다. 공수처장 후보 추천 등은 21대 국회가 본격적 활동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다뤄야 할 문제다.

더군다나 한명숙 전 총리 재판은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의혹에도 등장한다. 당시 여당이 신속한 처리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할 경우 상고법원 도입 필요성 설득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법원행정처 작성 문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한명숙 전 총리 판결은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시점에 한명숙 전 총리의 억울함을 말하는 여당 주요 인사들의 발언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물론 문재인 대통령도 한명숙 전 총리의 억울함에 공감하며 명예회복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재심을 통한 무죄 판결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명예회복’을 가능케 하는 또다른 수단에는 무엇이 있을까? 결국 특별사면 명분쌓기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 역시 법적 근거를 갖고 이뤄지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이 문제를 법치주의냐 아니냐의 쟁점으로 다룰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보수세력이 법치주의 붕괴를 우려하는 것은 단지 정파적인 반론일 뿐이고, 오히려 문제를 진지하게 다룰 마음이 없다는 얘기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태도는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당선인 관련 의혹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보수세력이 계속 언급하는 논리는 “회계 부정을 말하는데 왜 친일로 모느냐”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회계 부정과 친일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 문제도 이렇게 말하고 끝낼 일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역임한 천영우 씨는 최근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 했다. 2011년 말 한일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합의를 시도했지만 당시 영향력 상실을 우려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이를 반대해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향력 상실을 우려해 반대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당시 윤미향 당선인이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는 것 뿐이다.

이것은 단지 근거가 부실한 주장에 그치지 않는다. 이 지면에서 논한 바 있지만, 당시의 쟁점은 일본 정부가 내놓겠다는 돈의 성격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인지 여부였다. 양국 정부는 이 점에서 합의하지 못했다. 법적책임 인정을 요구하는 당시 정대협의 반대는 당연하다.

천영우 씨 뿐만이 아니다. 보수언론 지면에 실린 여러 칼럼들이 비슷한 주장을 여러 버전으로 내놓고 있다. 이런 주장이 일본 내 극우세력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은 사실이다. ‘친일’이란 지적은-이게 갖는 근본적 한계가 있지만, 이런 맥락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회계 부정을 지적했더니 친일로 몰아간다”는 항변을 하는 것은 불성실한 일이다.

물론 “이번 총선은 한일전”이라는 등 윤미향 당선인 포함 여당 일부의 주장도 이런 허망한 정치적 입씨름의 역사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유죄 판결이 나온 과정을 말하지 않으면서 편의적인 결론만 취하는 일부 여당 인사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정치가 뭔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보다는 정치적 게임을 위한 대립구도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치에 필요한 것은 협치가 아니고 제대로 된 대립과 갈등이 아닐까 한다. 검찰개혁이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든 제대로 해결을 해볼 마음이 없다면 정치적 잡음에 불과한 소음은 그만 만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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