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설국열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디어스=강남규] 영화 <기생충>이 큰 성취를 이뤘다. 한국 영화의 성취이자 봉준호 감독의 성취다. 이미 너무나도 많은 보도가 나왔으니 여기서 <기생충>이 세운 기록의 의미를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이 영화가 한국적인 소재와 디테일이 가득한 한국어 영화라는 점은 되새길 만하다. 봉준호 감독도 “한국 관객이 봐야 뼛속까지 이해할 수 있는 디테일이 곳곳에 있는 영화”(2019년 4월 제작보고회)라고 자평할 정도다.

이렇게 ‘한국적인’ 영화가 세계무대에서 두루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단지 영화적 완성도가 높다는 점을 넘어 세계인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물론 ‘불평등’이다. 워싱턴포스트나 뉴욕타임스와 같은 대표적인 외신들이 <기생충>에 관해 보도하면서 이 영화가 그려낸 불평등의 풍경이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 기사를 내기도 했다.

결국 우리가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을 수는 없다. 물론 이 영화가 불평등의 풍경을 그리는 방식에 대해서 논쟁이 있는 것도 사실인데,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실천적 메시지를 전하기보다는 그저 그것을 냉소적으로 그려내는 데 집중하고 있지 않느냐는 얘기다. 일리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선 여기서는 영화를 둘러싼 평단의 반응이 실천적 메시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기생충>이 미국 대선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석까지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주거관련 시민사회단체 회원, 종교, 노동계, 학계 대표자들이 13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020 총선주거권연대 출범 및 정책요구안 발표' 기자회견에서 주거복지 강화 정책보다 주거불평등을 야기하는 실태를 비판하며 영화 '기생충' 포스터를 패러디한 상징의식을 펼치고 있다.(연합뉴스)

하지만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 직후 한국에 펼쳐진 풍경은 헛웃음만 나온다. 먼저 정당들이 찬사를 쏟아냈다. 불평등 문제를 해소할 책임이 있는 여당은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저력을 다시 한 번 세계에 과시했다”는 말로 애국심을 고취할 뿐 불평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역사적 가해자인 자유한국당도 부끄러움에 침묵하기는커녕 “기념비적 사건”이라며 즐거워했다.

군소정당 가운데는 정의당 정도가 “영화의 주제의식이 세계의 한복판에서 인정받은 만큼, 사회 양극화 현상에 대한 해법 역시 세계적인 차원에서 논의”되기를 바란다고 브리핑했을 뿐이다. 한국의 극심한 불평등이 세계에 널리 폭로되었음에도 부끄러워하는 정당이 하나 없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는 언론들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불평등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인 양 선전해대던 보수 언론들도 신이 나서 다음 날 1면을 <기생충>으로 크게 꾸몄다. 어떤 언론들은 박근혜 정부 시절 봉준호 감독을 ‘블랙리스트’로 묶어놓고는 이제 와서 <기생충>의 성과에 찬사를 보낸 자유한국당의 뻔뻔함을 비판하기도 했는데, 그 언론 중 하나가 ‘한국경제’라는 사실은 민망하게 느껴진다. 역시 보수언론 그 어디도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불편해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기생충>이 사실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영화가 아닌 것은 아닌지 의심되기 시작한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영화가 맞다.

이 같은 난장에서 봉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의 결말부가 연상된다. 이 영화 역시 빈곤하고 열악한 꼬리칸에서 시작해 정반대에 있는 엔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부유하고 사치스러워지는 열차를 통해 불평등한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 <설국열차>는 꼬리칸의 민중들이 더 이상 빈곤을 참을 수 없어 반란을 일으키고 체제의 정점인 엔진실로 향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막대한 희생을 거쳐 마침내 엔진실에 다다른 반란군의 리더 커티스는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다. 반란을 유도한 것이 바로 엔진실의 지배층이었으며 인구를 효과적으로 줄이기 위해 그것을 유도했다는 끔찍한 진실. 결국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체제의 지배층이고, 피지배층의 그 어떠한 반란도 결국 체제 속에서의 무의미한 시도라는 냉소적 결말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 한 장면

불평등을 다룬 <기생충>이 천만 관객을 넘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을 만큼 영향력이 커져도 결국 체제의 지배층이라 할 만한 각 정당과 보수언론들이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왜일까. 정말 영화가 메시지를 연출하고 형상화한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영화라는 매체가 더 이상 사회적 실천의 도구로서 기능할 수 없을 만큼 산업화됐기 때문일까. 어떤 사람들은 영화라는 매체가 반드시 실천적인 역할을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을 텐데, 물론 영화가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본 우리 시민들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이 영화의 의미를 가장 복합적이고 정확하게 읽어낸 기사가 있는데, 다름 아닌 ‘미디어펜’에서 나왔다. 스스로 ‘시장경제 정론지’를 자처하는 극우에 가까운 매체다. 이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는 조우석 씨는 2월 5일 업로드된 “아카데미상이 코앞인 영화 '기생충', 과연 멀쩡한 작품인가?”라는 제하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그 영화를 블랙코미디 장르라고 규정하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발뺌하겠지만, 그 모두가 거대한 정치적 기만이다. 아무리 봐도 영화 '기생충'은 부자와 기업하는 사람 모두는 죽어 마땅하다는 메시지 전달에 충실한 정치 상품일 뿐이다. 부자와 기업인, 그들이 굳이 죄가 없다고 해도 끝내 죽이고 말겠다고 하는 섬뜩한 적의(敵意)와 핏빛 적개심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정확하지 않은가? <기생충>을 재밌게 봤다면 이 정도 의미쯤은 끄집어내야 한다. 조우석씨가 두려워하는 그대로, 한국 사회의 가난하고 차별받고 박탈당한 약자들을 대변하겠다는 정당들이 “부자와 기업인을 끝내 죽이고 말겠다고 하는 섬뜩한 적의와 핏빛 적개심”으로 정치에 임하는 계기로 <기생충> 열풍이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부자와 기업인’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은유고 ‘죽이고 말겠다’는 말은 ‘평등하고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꾸겠다’는 말의 은유이며 ‘섬뜩한 적의와 핏빛 적개심’은 ‘아름다운 진심과 뜨거운 열정’의 은유이니 오해하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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