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국제 외교 정세는 국내 엔터 산업의 직접 변수다. 한국 문화 산업의 주요 키워드는 소위 한류, 케이팝으로 불리는 세계화다. 케이팝이 미국에 진출했다, 유럽 투어를 한다고 해도 서구는 머나먼 시장이다. 큰 규모의 투어 공연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극히 일부 그룹을 빼면 수익성이 불투명하다. 아시아에 비해 팬덤 자체가 적을뿐더러, 장거리 이동에 경비와 시간이 타산이 맞지 않는다. 결국 큰 수익이 나오는 곳은 한국과 인접한 동아시아다. 지난 십 년 간 동북아 외교 정세는 부침의 연속이었다. 케이팝의 해외 사업도 풍랑을 탔다.

일본은 세계 2위의 음악 시장에 공연 문화가 활성화돼있으며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다. 케이팝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도 일본이다. 케이팝의 일본 진출 전성기는 소위 한류 2세대, 2010년대 초반이었다. 이 시기 한류는 세대와 계층을 넘나드는 대중적 문화였다. 2010년 오리콘 연간 세일즈 차트에서 동방신기가 기록한 매출액은 94억엔 가량이고 일본에서 활동하는 전체 가수 중 2위였다. 아직까지 케이팝 가수가 오리콘 세일즈 차트에서 거둔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2011년 일본 지상파 채널 TV 도쿄에선 카라를 주인공으로 한 12부작 드라마 <우라카라>가 방영되기도 했다. 2011년 케이팝 일본 매출 총액은 2880억이었다. 하지만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레임덕 돌파용으로 독도에 방문하며 좋은 시절은 저물었다.

2012년 8월 10일 오후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전망대에서 해안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유감성명을 발표하며 비판했고, 일본 외무상이 카라의 CD를 버렸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상상하노라면 굉장히 웃긴 시추에이션이다. 진위여부는 확인하기 힘들지만, 아무튼 일국의 고위 관료가 한국 걸그룹의 CD를 소장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 될 만큼 한류에 대중성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보편적 계층에 기반을 둔 문화였기에 한국을 향한 여론이 악화되며 직격탄을 고스란히 맞았다. 이후 몇 년 간의 침체기를 해동하고 한류를 재개한 선두주자 중 하나가 2015년 데뷔한 트와이스다. 일본인 멤버를 대거 발탁하며 높아진 진입장벽을 넘어선 점 등이 성공 요인이었겠지만, 아베와 ‘위안부’ 배상 협정을 맺는 등 박근혜 정부 시절 풀어진 한일 관계도 배경이었을 것 같다. 일본 최고의 음악 방송으로 꼽히는 ‘엠스테’(뮤직스테이션)에선 2012년 이후 한국 가수 출연이 끊기다시피 했었다. 현지에서 익히 입지를 닦은 보아, 빅뱅, 동방신기가 출연한 것을 빼면, 2012년 이후 데뷔한 아이돌 중에선 트와이스가 2017년 6월 최초로 엠스테에서 공연을 했다.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 한일 관계는 다시금 크게 악화됐다. 한국 정부는 박근혜가 맺은 ‘위안부’ 협정을 파기했고 일본은 한국에 경제 보복 조치를 취했다. 2018년 후반기에는 한국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떨어지며 일본 정부가 주일 한국 대사를 초치했다. 이런 양국 갈등의 고조 속에 터진 것이 방탄소년단 엠스테 출연 취소 사건이다. 단지 원폭 티셔츠가 문제였다기보다 난파된 외교 관계가 문맥으로 작용한 것이다. 특기할 건 엠스테 출연 취소 직후 방탄소년단의 일본 투어가 성황리에 치러졌다는 점이다.

이건 2세대 한류와 현재 케이팝 시장의 성격 차이 때문이다. 예전의 한류가 대중문화였다면 현재 한류는 젊은 일본 여성들의 ‘힙스터’ 문화 혹은 하위문화에 가깝다. 반한 여론의 파장이 가닿지 않는 지역에 있다. 범위는 줄었지만 뿌리는 단단해졌다. 한일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던 작년 여름, 일본 정부가 한국 기업에 수출규제조치를 내리고 한국에서 미쓰비시 압류자산 현금화 절차가 시작되던 와중임에도, 아이즈원은 일본 공영방송 NHK에 연이어 출연했었다. 2018년 케이팝 일본 매출액은 2980억으로 2세대 한류의 기록을 넘었고, 2019년에도 방탄소년단, 아이즈원, 트와이스, 세븐틴이 일본 투어 공연을 성황리에 수행했다.

그룹 방탄소년단이 지난해 '러브 유어셀프: 스피크 유어셀프 - 재팬 에디션'(LOVE YOURSELF: SPEAK YOURSELF' - JAPAN EDITION)을 개최해 총 21만 팬과 만났다고 소속사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밝혔다. 사진은 방탄소년단의 공연이 열린 일본 시즈오카 스타디움 전경.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중국은 일본 못지않게 국제 정세의 부침이 컸던 나라다. 2016년에는 트와이스 쯔위가 마리텔 청천 백일기 사건으로 중국과 대만의 뿌리 깊은 국가 알력의 희생양이 됐다. 박근혜 재임 기간 중엔 사드 배치 문제로 외교가 틀어지며 중국은 한국에 대해 경제적 문호를 잠근다고 엄포했다. 소위 ‘한한령’이다. 케이팝 기획사의 중국 사업엔 비상등이 켜졌고 케이팝 아이돌은 그 후 현지에서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교류가 끊어진 건 아니다. 기획사들은 현지 기획사와의 합작, 현지화된 아이돌 그룹 론칭 등으로 우회로를 찾았다. JYP 중국 법인 JYP 차이나는 2016년 중국 음악 스트리밍 기업 텐센트 뮤직 엔터테인먼트와 합작해 전원 중국인으로 결성된 보이그룹 보이 스토리를 데뷔시켰고, SM 엔터테인먼트는 현지 합작 레이블 LABEL V를 통해 중국, 대만, 태국인 등으로 구성된 보이그룹 Way V를 론칭했다. 반대로 중국의 엔터회사 위에화는 한국에 지부를 세워 직접 케이팝 그룹을 제작해 한국에서 활동시키고 있다. 중국인 멤버 역시 여전히 케이팝 그룹에 발탁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케이팝 그룹의 한국 발매 앨범에서 해외 판매량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데, 중국 팬들이 공동 구매하는 물량이 많고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 케이팝은 단순히 ‘세계화’라고 부르기 힘든 양상으로 경계를 넘고 융해되는 면이 있다. 예컨대 동아시아 시장의 경우 오랜 ‘글로벌리제이션’을 거쳐 세계화와 현지화가 함께 진행되는 ‘글로컬라이제이션’으로 이행하는 흐름이다. 이렇게 가는 이유는 동아시아 외교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고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완전히 현지화된 그룹으로 리스크를 회피해 수익 통로를 확보할 수 있으며, 현지의 좀 더 폭넓은 계층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일 외교 갈등으로 양국의 국민감정은 악화되었다. 그리고 이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며 중국과 인적 왕래가 단절되고 있으며 한국에선 중국을 향한 불신과 적대감이 높아져 간다. 말했듯이, 일본에서 한류는 차단되지 않을 것이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도 언젠가는 종식될 것이다. 케이팝 세계화의 문화적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수치로 표현되는 수출 실적이나 국위 선양을 넘어, 수교 상황의 경화 상태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문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은 아닐까? 가령 일본 케이팝 팬덤은 한국이란 기호에 관해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한국인 역시 그런 호의에 응답한다면 아이돌 그룹을 넘어 좀 더 복잡한 문제에 관해서도 대화의 장벽을 낮출 수 있지 않을까?

케이팝이 글로벌 시대에 한국이 지닌 자산이라고 할 때, 그것을 어떻게 유익하게 쓸 수 있을지 되새겨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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