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이 많지만, 그중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었다. 서울 구석진 동네에 살던 아이는 이 50권 속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향한 눈을 틔웠다. 물론 그 세상에는 주로 라플란드의 요정과 첨탑 위에서 물레를 빚는 마녀 등등이 살았지만, 그중에 <의사 둘리틀 선생>이 있었다.

퉁퉁한 덩치에 작고 동그란 안경을 걸친, 사람 좋게 생긴 의사 선생님은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원이 딸린 그의 집에는 언제나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는 의사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물들로 붐볐다. 사람을 치료하지 않기에 빈털터리가 되어 구멍 난 양말을 신어야 하는 형편이지만, 지하실 작은 굴에도 생쥐 손님들로 가득 찬 둘리틀 선생의 집. 아프리카에 원숭이들이 병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동물 친구들과 함께 먼 왕진 여행을 떠나는데... 이렇게 시작되는 둘리틀 박사와 동물 친구들의 모험담이었다.

닥터 두리틀이 된 로다주

영화 <닥터 두리틀> 스틸 이미지

그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는 둘리틀 박사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하 로다주) 버전 두리틀 선생으로 돌아온다니 익히 <아이언맨>에서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인 로다주였기에 '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엠마 톰슨, 라미 말렉 등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이 목소리로 출연한 동물 출연진을 상대로 역시나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였다. 그런데, 쉬지 않고 쏟아놓는 두리틀 선생으로 분한 로다주의 달변 그리고 허허실실한 연기는 <아이언맨>의 로다주와 그리 다를 바가 없는데 왜 <아이언맨>의 로다주가 그리워지는 걸까? 왜 연기는 로다주가 하는데 자꾸 조니 뎁의 기시감이 떠오르게 되는 건지? 작품 때문일까, 연기 때문일까?

<닥터 두리틀>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가족 영화의 전통을 고수한다. 아마도 원숭이가 열병에 걸렸다고 해서 아프리카까지 왕진을 떠나는 원작의 둘리틀 선생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다고 해서 인간의 치료도, 동물 치료도 거부한 채 두문불출 칩거하는 두리틀 선생으로 영화는 막을 연다.

그리고 할리우드 가족 영화에서 늘 그러했듯 두리틀 선생이 질색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인간적으로 혹은 사업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두리틀 선생은 동물들과 대화하는 자신만의 장기를 살려 위기를 타개하고, 목숨이 경각에 빠진 영국 여왕을 구해주기 위해 자신의 연인이 남긴 상상 속 장소라 여겨지는 미지의 세계 속 식물을 구하러 나선다.

동물들과 대화하는 의사 선생님인 만큼, <닥터 두리틀>의 동물 캐릭터들 역시 화려하다. 원작에 등장한 183살인가 하는 앵무새 폴리네시아는 예의 그 집사와 같은 노련한 포스로, 거기에 원숭이 치치, 개 지프, 오리 댑댑 외에 추위를 타는 북극곰과 겁이 많은 고릴라와 타조, 기린 등과 조수가 된 토미가 데려온 다람쥐가 있다. 마치 어벤져스 군단과도 같은 동물들은 영화에서 정말 어벤져스처럼 각자 자신의 몫을 다해낸다.

전형성 넘어서지 못한 할리우드 가족 영화

영화 <닥터 두리틀> 스틸 이미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방식이 역시나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방식이라는 점이다. 둘리틀 박사에게 동물의 말을 가르쳐 준 앵무새, 살림꾼 오리, 회계를 책임지는 올빼미, 런던의 모든 일을 꿰뚫는 참새는 이제 두려움에 떨다 결정적 실수를 하고 자책하다 위기 상황에서 닥터 두리틀의 목숨을 구하는 고릴라로, 서로 니가 잘하는 게 뭐냐며 아웅다웅하던 추위 타는 북극곰과 타조는 위기를 겪으며 '브로'의 관계를 형성한다. 섬에 갇힌 닥터 두리틀의 목숨을 위협하던 호랑이의 마더 컴플렉스 역시 기시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여왕의 방에서 특파원 노릇을 톡톡히 한 문어라든가 대벌레의 존재감은 색달랐지만,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그저 한 편의 평범한 ‘디즈니표 동물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둘리틀 선생의 바다 여행> 속 내용을 참조한 듯 고래까지 찬조 출연하여 박진감을 더했다. 그런데 난파선 잔해에서 유리병 조각으로 면도를 했다는 원작 둘리틀 선생의 넉넉함은 로다주 표 액션 어드벤처가 대신하고, 자칭 로다주의 동창이라지만 그에게 '열폭'하는 왕실 주치의의 도발은 치졸한 수준이었다. 또한 사랑하는 딸을 로다주에게 빼앗긴 아버지의 보복은 어설픈 감동 스토리로 마무리되며 갈등의 예봉을 무디게 만든다.

제아무리 가족 영화라 하더라도 어설픈 봉합이다. 가족 영화라 하더라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개'가 능사가 아니라는 건 분명한데 <닥터 두리틀>의 전략은 안이하다. 문제는 바로 로다주가 분한 두리틀 선생부터 동물들까지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디즈니 표 동물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기대되는, 딱 그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아이언맨>을 졸업한 로다주가 선택한 첫 번째 영화라면, 제아무리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 영화라 하더라도 기성품 이상의 감동을 기대하게 되지 않겠는가.

영화 <닥터 두리틀> 스틸 이미지

로다주는 <아이언맨>에서 보여준, 한없이 가볍다가도 어느 순간 훅 하고 감정을 울리며 들어오는 예의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연기의 폭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비슷한 캐릭터인데 두리틀은 <아이언맨>의 기성품 같다. 로다주는 지금까지 <셜록 홈즈> 시리즈 등에서 <아이언맨>에 미치지 못하는 틀에 박힌 캐릭터를 답습해 왔고, 아쉽게도 <닥터 두리틀>의 두리틀 캐릭터 역시 그렇다. 더욱 아쉬운 점은 로다주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예측되는 연기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이래로 트레이드 마크를 넘어 박제가 된 듯한 조니 뎁의 연기와 같은 잔상을 남긴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 가서 두어 시간 재밌게 보내기에 나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로다주가 나와 기대를 품고 간 사람이라면 어쩐지 이보다는 영화를 조금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인스턴트'의 향기를 느끼고 돌아설 것이다.

물론 모두가 '인스턴트'적인 것은 아니다. 뜻밖에도 로다주와 동물들이 평범한 캐릭터를 변주하는 가운데, 사냥꾼 집안에 태어나 동물을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아이 토미 스터빈스(해리 콜렛 분)가 스스로 닥터 두리틀의 조수가 되어가는 성장 스토리는 배우의 진솔한 연기 때문이었는지 평범한 이야기 속에 울림을 가지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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