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지금껏 케이팝 산업을 이끈 한 주체는 자생적으로 형성된 팬덤 문화다. 아이돌 팬덤은 더 이상 기획사의 종속 변수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과 의지를 지닌 집단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은 그 나름의 존중과 객관적 시각을 통해 이해되어야 할 존재이지만, 그 안 편을 휘저으면 병든 환부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팬덤은 아이돌을 향한 애정과 정서적 동일시로 구성된다. 그건 종종 맹목적 감정으로 변한다. 내 그룹을 지키겠다는 열정이 다른 그룹에 대한 공격성으로 뒤바뀐다. 그룹 간 경쟁 관계 혹은 그룹끼리 엮이거나 부대끼는 순간이 팬덤 간 알력 및 대결 관계로 변질되곤 한다. SNS와 커뮤니티에선 팬덤끼리 험한 말을 주고받는 일이 빈번하고, 물밑에서 ‘여론 작업’과 음해가 벌어지는 혐의가 수시로 노출된다. 일례로 몇 달 전엔 한 대형 커뮤니티에서 모 그룹의 팬덤 중 일부가 몇 년에 걸쳐 커뮤니티 여론을 관리하고 다른 가수의 팬들을 신고해 추방하려는 조직적 행각을 벌이다 덜미를 잡힌 적이 있다. 아이돌 팬덤들은 다른 그룹에 악재가 터졌을 때 악플 작성에 나서고 각종 인터넷 공간에 공유하는 혐의가 있으며, 더 심하게는 사실을 날조하여 적극적으로 유포하는 경우도 있다. 디씨 인사이드 기타프로그램 갤러리, AKB48 갤러리는 악성 아이돌 팬덤이 모여 복마전을 벌이는 쓰레기장이다. 이곳에는 매일 같이 특정 그룹을 겨냥한 허위 사실 유포, 통계와 언론 기사 짜깁기, 성희롱과 인신공격이 난무하고, 그런 게시물들이 추천수가 조작돼 베스트 게시물로 올라간다는 증언이 공공연하다. 게다가 이런 쓰레기 같은 게시물들이 외부 커뮤니티, 심지어 언론 기사를 통해 유포되기도 한다.

알력은 단발성 사건이나 아이돌 그룹을 넘어 팬덤 간 은원 관계로 고착되기도 한다. 내 그룹에 악재가 생기거나 비난을 받으면, 다른 그룹도 같은 잘못을 한 적이 있다는 식으로 고발하며 피장파장의 진흙탕 싸움으로 끌어들인다. 내 그룹이 당한 화를 분풀이하는 차원에서 팬덤이 작은 다른 그룹을 걸고넘어지며 때리는 행태도 있다. 경쟁 그룹을 공격하는 작업의 포석으로 그룹을 떠받치는 팬덤을 공격하며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일도 흔하다. 이 모든 정황은 그룹끼리 ‘엮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신경증, 타 그룹과 타 팬덤 언급을 금지하는 ‘언금’ 문화, 타 그룹 이름을 검색에 걸리지 않도록 바꿔 쓰는 ‘써방’ (써치 방지) 문화로 전치돼 있다. 이건 특정 사이트가 아니라 아이돌 문화가 소비되는 대부분의 장소에서 통하는 관습이다. 아이돌 판에서 관용어가 된 “머리채를 잡는다”는 표현은, 이 말 자체의 여성혐오적 속성만큼이나 팬덤 문화에 인이 박힌 알력과 갈등을 알려준다.

방탄소년단(BTS)이 지난 주말(10월 26∼27일)과 29일 사흘에 걸쳐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월드투어 '러브 유어셀프:스피크 유어셀프' 피날레 콘서트 무대에 올랐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이 아수라장이 펼쳐진 바탕은 코어 팬덤 중심으로 재편된 산업 환경이다. 언젠가 그룹 신화의 김동완은 ‘한국 아이돌 문화가 일본식으로 바뀐 거 같아 안타깝다’는 말을 한 적 있다. 감정노동 팬서비스 중심으로 가는 산업 경향을 가리키는 말일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은 팬 대면 이벤트의 문턱이 낮아 수백 수천 명이 참여하는 케이스가 있다면, 한국의 ‘팬 사인회’는 앨범 수장에서 많게는 수십 장을 사야 참여할 수 있는 코어 팬덤 중심의 행사다. 이들은 팬 활동을 위해 쏟아붓는 비용이 차원이 다른 만큼 아이돌에게 거는 충성심과 정서적 유착관계도 강렬하다. 2차 콘텐츠를 제작해 라이트 팬덤을 유치하고, 팬덤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고, 아이돌을 홍보하는 ‘영업’ 활동을 한다. 또한 각종 여론전에 가담해 암약할 개연성이 있단 추측도 할 수 있다. 기획사 팬서비스 시스템은 코어 팬덤을 육성하며 반대급부를 얻는 데 세팅돼 있다. 바이럴 마케팅과 매니지먼트의 일부 기능을 사실상 팬덤에게 외주하는 경향이 있어 혼잡함은 과열된다. 팬덤 문화에는 그룹의 차트 성적을 위해 모금을 하고 ‘스밍’을 하는 ‘총공’ 문화, 포털 사이트 댓글을 관리하는 ‘댓관’ 문화 등이 있다. 팬들은 이런 작업을 ‘노동’이라 부르며 다른 팬들에게 참여를 독려한다. 팬덤이 자발적 ‘열정 페이’의 종사자로서 기획사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 이런 노동의 보수는 결국 내 아이돌이 ‘꽃길’을 걷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팬들은 아이돌의 성공에서 내 삶의 광채를 얻으며, 그를 위해 경쟁자를 견제해 주려는 동기를 얻는다. 또는 내 아이돌의 악재에 비춰 다른 아이돌이 누리는 안녕에 박탈감을 느낀다.

아이돌 문화는 그 속성부터 우상을 향한 애착에 기반을 둔다. 아이돌 산업이 형성된 90년대, 00년대에도 팬덤 간 대결과 안티 문화는 도마에 올랐었다. 다만, 지금은 산업의 변천 및 이슈를 유통하는 온라인 네트워크의 과포화와 맞물려 여론전과 안티 행각이 더 일상화되고 더 전략적으로 매뉴얼화된 측면이 있다. 아이돌 팬덤 대다수는 미디어 리터러시가 고도로 숙달되고 인터넷 문화의 속성을 제 몸의 감각처럼 숙지하는 세대다. 이런 사람들 중 일부가 몇 년에 걸쳐 아이돌 산업에 정착하면서 여론전의 ‘전사’가 되거나 그 매뉴얼을 닦는 데 일조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썩어있는 건 언론이다. 연예 뉴스를 발행하는 매체, 웹서핑으로 가십을 복사해 누런색 제목을 달고 우려먹는 매체가 난립해 있다. 어떤 아이돌 그룹을 겨냥한 루머를 올려놓으면, 이들 매체가 물고 가 포털 사이트에 퍼트려준다. 예컨대 프로듀스 투표 조작 사태 이후, 앞서 말한 디씨 인사이드 악성 갤러리에는 날조된 사실로 프로듀스 그룹을 비방하는 게시물이 무더기로 올라왔는데, 아무런 검증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쓴 기사가 창궐했다. 아니, 사실은 검증할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 안티 팬덤과 악플러, 황색 매체들은 악의에 의해 손을 잡은 공생 관계에 있으니. 연예 뉴스 코너는 조회수의 경매장을 주관하는 포털 사이트와 직업의식과 자질 따위 없는 ‘언론인’들이 합작해 사회의 수질을 오염시키는 하수구다.

케이팝은 언론 특집 기사의 단골 주제가 되었지만 지금껏 팬덤 문화는 그다지 조명된 적 없다. 오히려 제도권 언론의 관심 밖에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아이돌 팬덤은 사회적 편견에 무시당해 왔거나 그 반작용으로 낭만화되어 왔다. 유력 언론은 글로벌 산업이 된 케이팝과 아이돌이 거둔 ‘수출 실적’을 중계하기 급급하며, 아이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체나 필자는 팬덤의 후원에 의지하는 면이 있어 그들을 비판적으로 공론화하기 쉽지 않다. 한 문화를 즐기는 취향과 열정 자체는 존중받아야 한다. 어쩌면 아이돌 문화 같은 일부 문화는 유독 그 존중을 얻지 못했었는지 모른다. 악성 게시물은 아이돌 팬덤을 훨씬 넘어서는 사회 문제인 것도 분명하다. 어떤 전면적 규정으로 섣부르게 재단해서는 안 될 이유이지만, 이 문화에 깔린 어둠이 있다면 더 이상 없는 셈 외면해서도 안 될 것 같다.

언젠가부터 아이돌에 관한 논란은 사회 이슈와 도킹하며 공공의 의제로 비화되는 경향이 있다. 여론에 불을 붙이는 이들이 파급력을 키우려 그걸 의도하는 혐의도 보인다. 지난 일 년 이상 사회 메인뉴스는 한일관계 경색이었는데, 케이팝 신의 가장 큰 해외 시장도 일본이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 아이돌들은 돌아가며 설화에 휘말렸고 여론의 핍박을 받았다. 여기엔 국내 케이팝 팬덤이 세계화에 대한 자부심 혹은 반작용으로 국수주의와 반일 성향을 강하게 띄고 있다는 사실이 문맥으로 작용했을 것 같다. 이런 이슈화 과정은 청와대 국민 청원, KBS 국민 청원 같은 공적 의제 창구를 통해 증폭되었다. 지금 한국 사회엔 카카오톡 단톡방부터 청와대 게시판까지 무수한 층위의 온라인 네트워크가 뻗어있다. 포털 사이트와 SNS를 매개체로 이슈가 빈발하고 연소하기 너무나 쉬운 환경이다. 가십의 우범 지대 속에서, 소속 정파와 이념 노선, 문화적 취향에 따라 쟁점을 공론화하고 화력을 동원해 여론을 움직이려는 팬덤 정치가 일상화됐고 만인 대 만인의 여론전 사회가 열렸다. 아이돌 팬덤 문화의 어둠은 아무런 게이트 키핑이 작동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 이 시대 공론장의 또 다른 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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