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스콜세지 감독은 <아이리시맨>에서 꼭 80살을 앞둔 배우들을 주연으로 캐스팅 해야 했을까.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디에이징(Deaging)이라는 최신 기술까지 써가며 말이다.

물론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의 앙상블을 스크린에서 보는 건 가슴 벅찬 일이다. 그러나 기존 스튜디오에서 제작비를 조달 받을 수 없어 결국 넷플릭스까지 찾았다는 사연을 듣고는 차라리 규모를 타협해 필모그래피를 한 편이라도 더 늘리는 게 영화팬들을 위해서라도 옳은 선택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런 불평은 영화가 시작하고 209분 후 말끔히 사라졌다. 스콜세지는 스콜세지였다. 명작이 아니라 망작을 만들 때 비로소 뉴스가 되는 감독이다. 얼마의 비용이 들든 그 배우들을 캐스팅 해야만 하는 이유도 있다. 영화의 주제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느릿느릿한 트래킹샷으로 요양원의 복도를 보여준다. 카메라가 한참 동안 요양원을 훑고 나서야 휠체어에 앉아 있는 프랭크(로버트 드니로)를 만날 수 있다. 듬성듬성한 백발의 프랭크는 건너편의 누군가에게 지난 60년의 세월을 회고 한다. 스콜세지는 생명력이 말라버린 프랭크의 목소리를 통해 다각도로 죽음에 접근한다. 그 죽음은 사회적 죽음, 장르적 죽음 그리고 생물학적 죽음이다.

먼저 사회적 죽음이다. <아이리시맨>에서 사회적 죽음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러셀(조 페시)을 중심으로 한 패밀리의 결정에 따라 내려지는 자연재해 같은 심판이다. 프랭크는 군말 없이 패밀리의 결정을 수행하는 집행관이다.

평소 프랭크의 집행은 간결하다. 목표물에 접근한다. 총을 쏜다. 벽과 바닥에 피가 튄다. 재빨리 사라진다. 총은 강에 버린다. 그뿐이다. 스콜세지는 관객들이 그의 영화에서 예상(혹은 기대)하는 그 어떤 창의적 폭력씬도 연출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집행관으로써 프랭크의 기계적인 면모를 부각한다.

이 담담한 일상에 지미(알 파치노)가 심판대에 오르며 균열이 생긴다. 프랭크는 지미의 보디가드였지만 오랜 시간 함께하며 형제처럼 우정을 나눴다. 자기주장이 강한 지미, 무색무취하게 명령을 따르는 프랭크는 죽이 잘 맞았다. 상하관계였지만 가족들끼리 모임을 가질 정도였다.

프랭크의 딸 페기(안나 패킨)가 유일하게 따르던 어른도 지미였다. 어린 페기 앞에서 무참히 식료품점 주인을 폭행하던 프랭크. 자상하지만 프랭크에게 수상한 임무를 맡기는 러셀. 그러나 페기가 보는 지미는 둘과 달랐다. 미국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유명하고 화물운송업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의로운 노조위원장. 술을 멀리하고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유쾌한 아저씨가 지미였다.

패밀리의 결정이 번복되도록 평소와 달리 프랭크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며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지만 지미의 고집 탓에 번복의 여지는 사그라지고 만다. 이제 프랭크에게는 괴롭고 긴 여정만이 남는다. 3일 간 고속도로를 달리고 경비행기에 탑승한 뒤, 어딘지 모를 곳에 내려 새로운 차를 지급 받고 목적지까지 또 다시 운전을 한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목표물에 접근해서...

그로부터 3일 후. 지미의 실종소식이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프랭크는 가족들과 함께 TV로 뉴스를 보다 자리를 뜬다. 방에 들어가 지미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더듬거리며 위로를 건네지만 그 모습을 지켜본 페기는 이후로 평생 프랭크와 말을 하지 않는다.

재밌는 점은 프랭크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그럴 필요가 있나 싶게 자세하게 여정을 보여주던 것과 달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활주로에 착륙하는 경비행기의 모습 하나로 끝난다. 마치 마음의 짐을 덜었다는 듯 말이다. 물론 그 마음의 짐은 프랭크에게 가족이란 존재와 묶음포장이 되어있는 듯하다.

다음으로 장르적 죽음이다. 폭력과 살인을 밥 먹듯 하는 거친 남성.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객체화 된 여성. 폭력에 대한 미화. 무엇보다 100년 간 다양하게 변주되어 더 이상 새롭게 나올 이야기가 없는 고인물 장르가 갱스터 무비다. 그래서 스콜세지가 갱스터 무비를 만든다고 했을 때 기대만큼 우려도 컸다. 굳이 이 시대에 이 장르의 영화를 그가 또 한편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그에겐 이미 완벽한 갱스터 무비인 <좋은 친구들>이 있는데.

하지만 <아이리시맨>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켰다. 영화에서는 새로운 갱스터가 등장할 때면 프레임이 정지되고 네임택이 붙는다. 스콜세지가 자주 쓰는 연출이다. 그리고 네임택 밑에 또 한줄의 설명이 적혀있다. ‘00년에 XX해서 사망’. 갱들은 하나같이 마초적 에너지를 내뿜으며 등장하지만 어김없이 죽는다. 집 앞에서 총격을 당하고 차가 폭발하기도 한다. 노환으로 사망이란 이유에서는 극장 여기저기서 헛웃음이 터졌다.

영화가 더욱 흥미로워지는 건 지미의 실종 이후다. 스콜세지는 집요하게 패밀리의 노화를 그린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알고 있다‘고 표현한 패밀리의 중심이자 브레인인 러셀은 이가 다 빠져서 포도주에 적신 빵도 씹어 삼키지 못한다. 프랭크는 관절염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페기를 비롯한 딸들은 이미 아버지와 연을 끊은 상태다. 혼자서 곧 누울 관짝을 고르고 납골당 자리를 선택한다. 요양원에 찾아오는 건 생사고락을 함께한 패밀리가 아니라 죄를 뉘우치라는 신부, 미제사건으로 남은 지미의 실종 이유를 캐묻는 경찰뿐이다.

영화평론가 리처드 시켈과의 대담집인 『마틴 스코세이지와의 대화』에서 스콜세지는 <비열한 거리>의 주인공들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말한다. 갱스터인 그들에게 최악의 상황은 살아남아서 수모를 당하는 일이라며. <비열한 거리>는 주인공들이 살아남는 장면에서 영화가 끝난다. 스콜세지는 기어이 45년 후에 <비열한 거리>에서 보여주지 못한 갱스터에게 어울리는 최후를 그리는 데 집중하고 당당하게 성공한다.

마지막으로, 앞선 두 가지의 죽음을 아우르는 것이 바로 생물학적 죽음이다. 디에이징 기술은 놀라웠다. 대배우들의 (비교적) 젊은 시절 모습을 되살린 것만으로도 영화팬들은 진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대배우의 회춘은 이목구비에 그쳤다.

함께 공개된 다큐멘터리 <아이리시맨을 말하다>에 따르면 현장에서 스콜세지 감독은 알 파치노와의 첫 촬영에서 숫자를 외쳤다고 한다. 51! 65! 적어도 40대의 지미를 보여줘야 할 알 파치노가 스콜세지가 외친 숫자만큼의 나이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였다(1940년생인 알 파치노의 현재 나이는 79세다). 배우들의 동작을 체크하는 코치가 따로 있었다지만 굼뜨고 느릿느릿한 동작은 스콜세지가 의도했든 아니든 영화 전체에 묘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스콜세지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여 대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을 필요가 있었을까. 언제 부고가 들려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연기의 신이라는 대배우들도 극복하기 버거운 노화의 흔적을 감당하면서까지 굳이? 질문을 더 정교하게 다듬어보자. 왜 스콜세지는 죽음의 그림자를 209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일부러 진하게 드리웠을까?

가족들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았지만 죽음만 남겨둔 악인. 한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수많은 변용으로 생명력을 다해가는 갱스터 무비라는 장르. 둘에게 자연스러운 종언을 고하기에 최신 테크놀로지를 실험적으로 도입하고, 갱스터 무비를 대표하는 무게감 있는 캐스팅을 성공시키며, 자신 또한 갱스터무비의 역사를 써내려간 감독을 스콜세지 말고 또 떠올릴 수 있나. 새로운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스콜세지의 품격 있는 사망선고를 함께 감상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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