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대학생 시절 대학언론에서 활동했다. 학내 민주주의 강화를 기조로 하는 언론이었다. 그러다보니 쓰는 글마다 결론이 똑같았다. “학생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 학과 통폐합에 대해 쓸 때도, 학생 징계에 대해 쓸 때도, 총학생회 선거에 대해 쓸 때도 늘 결론이 그랬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학생사회의 관심이 없는 한 어떤 문제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뻔하고 추상적인 결론이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결론을 낼 수 없었다.

이렇게 추상적인 결론을 제시하는 글들은 보통 잘 안 팔린다. ‘그게 되겠냐’, ‘그래서 대안이 뭐냐’는 냉소적 반응이 돌아오면 차라리 다행이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시선을 끌지 못한 채 수많은 글들 속에 묻힌다. 사람들은 신선하고 명쾌하며 직관적인 대안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수요에 적극 호응해 제법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기도 한다. 법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야 한다거나, 특정한 방법으로 ‘일점돌파’해야 한다는 식이다. 대학 문제를 예로 들면 학생회와 교수집단과 대학본부가 의결권을 평등하게 나눠 갖는 제도를 만들자는 대안을 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떻게?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대안을 관철시키는 건 현실 속 권력관계의 문제다. 학내 민주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위적이고, 대체로 당위적인 주장은 그것을 요구하는 세력이 영향력을 갖지 않고서는 무력한 법이다. 의결권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대학본부가 응하도록 하려면 결국 “학생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 뻔한 결론인 걸 알지만 그런 대안밖에 내놓을 수 없었던 이유다.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 분향소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제공]

한 달 전 이 지면에 산업재해 사망사고에 대한 글을 썼다. 그 이후로도 노동자들의 죽음은 참 꾸준히도 이어졌다. 시민단체 ‘노동건강연대’의 집계에 따르면 10월 한 달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만 50명이다. 그렇게 죽음을 알리는 뉴스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으나 단 한순간도 바로잡히지 못한 채 지독하게 일상화되어, 아침에 일어나면 시큰둥하게 스쳐 보는 일기예보와 같은 일이 되고 만 것일 테다. 그러다 어느새 ‘산업재해로 1년간 2천 명 사망’이라는 끔찍한 통계로 누적되어 불현듯 우리를 또다시 충격에 빠뜨리고, 그제야 정치권은 “산업재해를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또다시 그때뿐일 것이다.

죽음이 매일같이 이어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꼈나 보다. 지난 한 달 사이만 해도 산업재해 사망사고에 대한 기사들이 셀 수 없이 발표됐다. ‘사람이 일하다 죽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 글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 역시 ‘뻔하고 추상적인’ 결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좀 더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으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구체적인 대안이 나온들 그것이 관철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지역의 서로 다른 일터에서 서로 다른 고용형태를 갖고 서로 다른 시간에 노동하다 떨어지거나 짓눌리거나 부딪혀 죽는, 노동조합의 보호 바깥에 있거나 노동조합이 충분한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일터의 사람들을 죽지 않게 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 같은 건 없다. 그 대안을 관철할 수 있는 권력과 권한을 쥐었으며 그래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정부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은.

산업재해 사망사고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지금 문재인 정부는 산업재해에 대해 놀랍도록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노동자들의 부고 기사가 청와대로 들어가는 신문들에는 잘 실리지 않거나 사소한 기사로 취급되기 때문일까. 이렇게 ‘사람이 일하다 죽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이 무력한 상황이라면 결국 결론은 다음과 같을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반응하도록 하려면 “우리 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 뻔한 결론인 걸 알지만, 그것만큼 근본적인 대안이 달리 있을까.

전태일 열사의 49주기를 맞은 오늘 저녁, 산업재해 사망자 고 김용균씨를 기억하고 그와 같은 죽음의 행렬을 끊어내기 위해 창립된 김용균재단은 전태일동상에서 광화문광장에 차려진 고 김용균씨 분향소까지 행진할 계획이다. 행진의 구호는 물론 뻔하다. “죽지 않고 일할 수 있게! 차별받지 않게!”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49년 동안 아직 이것조차 이루지 못한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신선한 말을 내놓기란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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