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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특선 다큐] 인간의 증오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기사승인 2019.11.09  1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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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비평] 톺아보기

[미디어스] 그 어느 때보다도 광장이 뜨거웠다.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으로 대립한 사람들은 온라인이라는 공간에 만족치 않고 광장으로 뛰쳐나갔다. 그저 의견이 다르다고 말하기엔 너무도 극명하게 서로에 대해 증오로 가득한 말 폭탄을 쏟아놓는 시절, 과연 이런 대결의 현실이 봉합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당사자들은 봉합이 아니라 자신들의 옳은 의견으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단언할 것이다. 문제는 그 대결의 양자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다.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대립, 궁하면 돌아가라는 선인들의 지혜를 빌려봐야 하나. KBS1이 그 지혜의 실마리를 풀어놓았다.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기획, 제작한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 시리즈이다. 11월 5일과 6일에 걸쳐 방영된 1,2부는 '증오', 그 기원의 진화론적, 사회사적 의미를 파헤쳐본다.

증오의 기원

KBS 1TV 특선 다큐멘터리 6부작 <스티븐 스필버그의 질문,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

진화심리학자 브라이언 헤어와 함께 탐구한 1부 증오의 기원, 다큐는 '증오'는 인간의 본성인가?라고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과 유전자가 99% 일치한다는 보노보와 침팬지. 하지만 이 두 종은 친화적인 암컷 지배와 공격적인 수컷 지배로 전혀 다른 사회적 관계를 보여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다큐는 지리적 원인에서 찾아본다. 기원전 6백만 년 전에 콩고강을 사이에 두고 분리된 두 동물군, 먹이 걱정이 없는 보노보가 사교적이고 친화적인 공동체를 꾸린 반면, 한정된 먹이를 두고 경쟁을 해야 했던 침팬지는 다른 무리에 적대적인, 심지어 자식들이 많다고 여겨지면 어린 침팬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공격적 성향이 높은 무리가 되었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먹이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자연적 환경에서 동물들의 증오가 싹텄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인간은 친화적이며 사랑을 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특정 상황에서 보여주는 적대적인 모습은 인간이야말로 가장 증오가 가득한 생명체임을 유감없이 증명해낸다. 특히 인간이 증오를 표명하는 방식 가운데 집단 따돌림은 빈번하게 보인다.

10대의 왕따 현상을 살펴보면 따돌리는 아이들이 비주류라는 기존의 선입견과 달리 가해자들은 비주류도 아니고, 따돌림은 충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외려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인기 있는 부류들이 하는 보편적인 행태라는 것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건 바로 공평함이다. 불공평한 상황에 대해 인간은 그걸 학대나 위협이라 여기며 인간성의 어두운 면을 폭력적으로 드러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에서 벌어지는 학교 등 집단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복수인 총격 사건,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세상에 기대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기억이 분노를 키우고, 이런 분노에 대해 인터넷 공간에서 응원을 받으며 무기와 탄약을 비축하는 등 용의주도한 준비 끝에 폭발한다. 또한 특정하고 제한적인 세계관의 경험이 증오를 증폭시키기도 한다. 동성애 반대 시위로 유명한 미국의 원리주의 침례교 단체에서 보이듯 스스로 내몬 수난으로 인해 신념은 강화된다. 친족 관계로 얽혀진 이 단체에서의 탈퇴는 마치 팔다리가 잘린 채 상어가 득실거리는 바다에 던져지는 공포감을 느끼기에 쉽사리 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증오는 유전적인 소인을 가지고 사회적 배제를 통해 증폭되며, 자신이 소속된 집단적 정서로 인해 폭력의 정서를 수용하게 만든다.

편가르기의 기원

KBS 1TV 특선 다큐멘터리 6부작 <스티븐 스필버그의 질문,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집단을 미워할까? 인간은 편가르기를 좋아한다. 종교, 인종, 정치 성향을 근거로 사람을 분류하고 '나랑 다르구나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편을 극단적으로 응원한다.

이 원인을 인지 과학자 로리 산토스는 부족주의(tribalism- 부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힘을 과시하는 현상)에서 찾는다. 1950년대 사회 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오클라호마에서 15살 소년들을 모아놓고 가짜 야영 캠프 실험을 했다. 가상의 시합을 한다고 편을 가르게 된 소년들은 급기야 기를 불태우고 야영지를 습격하며 상대 집단을 괴롭히는 등 경쟁이 과열되는 행동의 변화를 보였다.

이를 통해 개인의 행동은 그의 성격이 아니라 직장, 가정, 지역 사회 등 이른바 그가 속한 부족에게서 영향을 받게 됨이 증명된다. 더구나 경쟁을 벌어야 하는 상황은 집단 간의 증오심을 발동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바로 특정 지역을 연고로 한 스포츠 팬들의 강한 충성심이다. 진화한 형태의 전쟁이라 정의 내려진 스포츠는 승리, 전리품인 트로피 등의 전쟁의 상징적 요소들을 가지고 특별한 유대감으로 결속하게 된다. 그냥 밉다는 상대편, 이렇게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 정체성에 완전히 녹아드는 극단적 유대 관계가 바로 정체성 융합이다.

옆의 팬이 공격당하면 마치 자신이 공격당했다고 느끼고, 축구가 아니라 동료 팬들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폭력적이 되는 상황, 개인들은 적극적으로 집단을 보호하고 방어하며 마치 각자가 최전방에서 싸우는 전우처럼 서로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심정이 된다. 이런 폭력적 편가르기는  과거 부족사회에서 구성원들의 단결이 곧 생존을 보장했던, 살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던 심리 기제에서 비롯된다.

이런 정체성 융합에 기반한 부족주의가 스포츠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에서도 극단적으로 존재 양태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진보적 민주당원과 보수적 공화당원은 서로 자기 쪽만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 진영을 악이라 규정하고 증오한다. 심리적 메커니즘은 스포츠 부족주의와 동일하지만 그 신념과 윤리적 강도는 정치적 진영논리가 훨씬 더 심하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 양극화가 사회 관계망을 파괴하고 있는 것, 성향이 다르면 가족이라도 함께하지 않으며 타 인종보다도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과 사귀는 걸 꺼려할 정도로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진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을까? 앞서 종교적 극단주의 단체가 친족에 기반하듯, 미국 내 보수와 진보적 입장은 대다수 부모와 지역으로부터 비롯된 환경적, 문화적 요인이 결정적이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유전적 요소는 강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마치 우리의 지역 감정처럼.

집단만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이들에게 객관적 사실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실제 취임식에 모인 군중이 오바마에 비해 적었음에도 트럼프를 지지한 사람들은 편견으로 이를 왜곡하여 가짜뉴스를 만드는 지경에 이른다.

증오의 도구가 된 기술의 발달

KBS 1TV 특선 다큐멘터리 6부작 <스티븐 스필버그의 질문,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인터넷, 블로그 등의 기술의 변화는 이런 양극화 심화를 완화시키기는커녕 외려 조장하고 있다. 부족주의를 이용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언론 매체는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좀 더 자극적이고 신랄하게 전달하여 수익을 올린다.

페이스북 등 사용자가 집단 안에서 위안과 안전함을 느끼도록 패러다임이 짜인 각종 소셜 미디어는 생각이 다른 팔로어를 위협으로, 내집단과 외집단의 교류를 배제하고 내집단 구성원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밀폐된 공간이 되기 십상이다. 거기에 사용자의 관심을 오래 끌 수 있는 콘텐츠를 전달하도록 만든 알고리즘은 분노, 공포 같은 부정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의 콘텐츠를 통해 부족주의를 자극하며 사고를 극단적으로 증폭시킨다.

지난 2016년 모든 무슬림은 극단주의자라는 생각을 가진 극우 불교 승려 위라투는 무슬림 남성이 불교도 여성을 성폭행하는 가짜 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한다. 무슬림이 다수 불교도를 위협한다고 선동하는 이 영상으로 인해 불교도의 폭동이 유발되었고, 2017년 미얀마 서부 무슬림 소수 민족 로힝야족 학살이 초래되었다.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할 소셜네크워크가 추악한 인간 본성을 품어낸 결과였다.

외부인에 대한 공포와 분보를 선동하는 것만큼 집단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건 없다. 이에 감정 이입을 한 인간들은 같은 종인 다른 인간에게 서슴없이 잔혹해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끊임없는 갈등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이미 힘의 균형점을 잃은 지 오래지만, 상대가 당한 부당함은 보지 않은 채 각자 자신들이 가진 상흔의 역사에 기반하여 자신들을 희생자라 여긴다.

이러한 경쟁적 피해의식은 궁극에 가서 상대편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게 된다.

실제와는 다른 심리적인 상태에 따른 인식은 확증 편향(자신의 신념, 가치관, 판단 따위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가지며 정치인들은 이를 부추긴다.

인지 심리학과 진화 심리학에 근거하여 추론해 본 증오 사회의 기원, 인간이 아닌 동물 실험과 우리나라가 아닌 타국의 사례들이 등장했지만, 그 기원에서 비롯된 증오가 만연한 사회는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사회는 증오로 분열되고 폭력적 갈등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까? 그 암담한 현상에 대한 희망을 앞서 셰리프의 실험이 전한다. 편을 갈라 싸우던 소년들, 하지만 급수하던 탱크에 돌을 넣어 당장 마실 물이 급해지자 갈등은 잠시 접어두고 물 구하기 합동 작전을 벌인다. 이렇듯 보다 긴급한 상위의 목표는 집단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다. 한때 적이 보다 더 큰 적 앞에서 손을 잡았던 세계대전의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인간 집단 간의 증오는 얼마든지 바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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