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지난 6일 엠넷 아이돌 오디션 방송 <프로듀스> 시리즈를 연출한 안준영 PD가 <프로듀스 48>과 <프로듀스 X 101>의 투표 조작을 시인했다. 11일로 예정된 아이즈원의 컴백은 모든 것이 하루 만에 백지가 됐다. 각종 방송 출연 및 음반 발매 취소 소식을 타전하는 뉴스가 포탈을 뒤덮었고 열두 명의 아이돌을 향해 손가락질이 쏟아졌다.

투표 조작이 수사 대상이며 선을 넘은 불공정행위란 점은 토론할 가치가 없다. 지난달 이 지면에 기고한 '오디션 드림의 종말'에서 투표 조작 사태가 CJ E&M의 가요 시장 수직계열화가 낳은 구조적 비행이란 점을 선명하게 질타했다. 아이즈원이 투표 조작으로 탄생했다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도 필연이다. 묻고 싶은 건 그걸 알리고 받아들이는 사회적 행태, 나아가 구조적 책임 소지다. 투표 조작이 비난받아 마땅하다면 시청자, 출연자와의 약속을 위반하고 공정성의 가치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 사회가 ‘올바른’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 비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비판자들 역시 올바른 방식으로 비판할 책임이 있다.

'투표조작 의혹' 오디션 프로그램 수사 확대 (CG) [연합뉴스TV 제공]

<프로듀스> 사태를 다룬 신문 보도를 보자. “아이즈원, ‘프듀 조작 의혹’에 11일 컴백 쇼케이스 취소”. 이 정도는 사실관계를 전달하는 무난한 스트레이트 기사다. ”정신 못 차린 엠넷, 조작 사실이면 엑스원·아이즈원 해체하라" 이 표제는 거의 감정적인 어조로 ‘해체’라는 결말을 요구한다. 이번엔 이런 기사를 보자. ”아이즈원 갤러리 "허민회 대표 공식 사과→11일 고별 무대 원한다"“ ”아이즈원 갤러리 "아이즈원 정당성 사라져" 해산 요구·CJ ENM 사과 촉구(공식입장 전문)“ 이 기사들은 DC 인사이드 ‘아이즈원 갤러리’에 올라온 작성자 불명의 게시물을 받아썼다.

해당 갤러리는 게시판 매니저 기능이 없어 유저들에 의한 게시판 자치가 불가능한 소위 ‘메이저’ 갤러리다. 이름만 아이즈원일 뿐 아이즈원 팬 커뮤니티라 보기 어렵다(아이즈원 팬 갤러리는 ‘아이즈원 츄’라는 이름의 ‘마이너’ 갤러리가 따로 있다). DC 인사이드에는 이런 맹점을 노리고 특정 아이돌 그룹의 안티 팬덤이 해당 그룹의 입지를 좁히는 자해적 주장을 흡사 팬덤 전체 입장인 것처럼 작성해 갤러리에 게시하는 사례가 흔하다. 저 ‘공식 입장’ 역시 해당 게시판에서 전혀 합의되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고, 현재 베스트 게시판에서 내려간 상태다. 이런 ‘여론 공작’이 통하는 이유는, 사실관계를 따져 보지도 않고 기사부터 쓰며 화젯거리로 만들어주는 기자와 언론이다.

인터넷에선 아이즈원을 향한 비난이 위험 수위를 넘나 든다. 커뮤니티에선 투표 조작을 조롱하며 멤버들을 성희롱하는 게시물이 올라오기도 하며, 그룹의 앞날, 멤버들 장래를 즐겁게 저주하는 게시물이 호응을 얻기 일쑤다. 책임감이 담보되지 않는 인터넷 여론의 천박한 본성이기도 하지만, 여론에 정제된 토론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는커녕 여론의 정념에 업혀가며 무책임한 기사를 내보내는 언론 책임도 있다. 가령 현재 언론들은 투표 조작에 관한 경찰 소스를 받아적으며 밝혀지는 혐의점들이 <프로듀스 X>에 해당하는지, <프로듀스 48>에 해당하는지 구분 짓지 않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오해의 소지와 논란을 눈덩이처럼 굴리고 있다. 언론의 권위가 떨어지고 SNS에 의해 소외되는 시대지만, 여전히 인터넷 여론은 사실과 논평을 공식화하는 언론 기사를 참조하고 공유하며 그 내용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건 투표 조작을 변호하는 주장이 아니다. 언론의 과잉 보도와 여론의 폭력을 논평하는 것이다. <프로듀스> 논란의 가장 큰 피해자는 조작으로 탈락하게 된 연습생들인 것도 물론이다. 하지만 이 모든 소음 속에 진정한 책임자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자신이 위임한 권력과 가요 산업 수직 계열화를 통해 대형 프로젝트 그룹의 데뷔조를 조작할 배경과 구조를 만든 CJ E&M이다. 안준영 PD가 조작을 시인한 지난 수요일 이후 쏟아진 기사에는 아이즈원이란 이름이 전면에 걸려 있었고, 이들에게 파멸을 언도하는 표제가 쏟아져 내렸다. 여론의 화살 또한 안준영 PD 혹은 엠넷이 아닌 아이즈원 멤버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걸그룹 아이즈원 [오프더레코드 제공]

8일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제작진이 최종 20위에 뽑힌 연습생 중 12명의 데뷔조를 골라서 임의로 순위를 매겼다고 한다. 기사에는 이것이 아이즈원의 경우인지, 엑스원의 경우인지 혹은 둘 모두 해당하는 것인지 명확히 서술되어 있지 않다. 지금 이 글이 지면에 게재되는 사이 새로운 뉴스가 나올 수도 있다.

로우 데이터가 공개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방송 중 발표된 순위 추세에 비추면 조작이 가해지지 않은 로우 데이터 상으로도 데뷔 순위에 들었던 멤버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만약 실제론 더 높은 순위를 기록했는데 더 낮은 순위로 조작된 채 데뷔했다면 그 역시 투표 조작의 피해자다. 설령 조작으로 데뷔한 경우라도 미성년자 중고생들이 방송국과 기획사의 유착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 물론 투표 조작으로 데뷔했거나 경연 곡을 미리 전달받는 수혜를 입었다면 그에 따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책임 소지의 주도성과 경중을 가려서 판단하자는 뜻이다. 가령 십대 청소년이 기획사 수뇌부가 지시하는 사항을 거부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될까? 아이즈원 멤버 중엔 <프로듀스 48> 방송 내내 분량이 많지 않았고 서사의 중심에도 있지 않았지만, 경연에서의 선전을 통해 화제가 돼 높은 순위로 치고 올라간 멤버도 있다. 지금 당장 그룹이 해산하게 된다면 그는 일 년이 넘는 시간이 허사로 돌아가고 차후 ‘조작 그룹’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사는 또 다른 피해자가 된다. 상황은 일파만파로 재생산되는데 멤버 다수가 10대 중반에서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다. 세상의 거대한 따돌림과 아무런 완충 장벽없이 직면하는 건 그들이 직접 저지른 잘못이 없다는 점에 비추면 너무나 과도한 징벌이다.

CJ E&M은 자신이 엎지른 비극을 자신이 수습해야 한다. 사건에 대한 이렇다 할 움직이나 구체적 입장 표명 없이 아이즈원의 컴백을 취소하고 해체하는 것으로 책임을 잘라내선 안 된다. 투표 조작으로 탈락한 피해자가 있다면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합당한 배상을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제대로 된 사과를 표명하며 차후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사업 방식도 쇄신해야 한다. 그런 도덕적 화살 과녁의 역할을 다 한 후에 아이즈원 멤버들과 팬들에게도 책임을 다해 그들의 장래를 논의해야 한다. 그 구체적 방안은 CJ가 찾아야 할 것이다. 현재 사안을 비판하는 이들도 이런 논점을 인식한 채 비판을 가져갈 필요가 있다.

아이즈원을 향한 비난이 거센 데는 아마도 ‘금수저’와 ‘흙수저’의 서사, 권력과 연줄에 의한 특혜의 대물림, 노력을 해도 짜인 각본에 의해 처음부터 배제되는 불공정 사회의 이미지가 투영돼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투표 조작을 비판하는 것은 옳되, 그 사회를 만든 이들, 오디션 방송의 투표 조작을 모의한 이들이 이제 막 데뷔한 10대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아니란 사실은 상기해도 좋을 것 같다.

어른들이 공모한 뒷거래의 죄값을 치를 제물을 찾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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