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극단 실험극장의 대표 레퍼토리 연극 ‘에쿠우스’가 류덕환의 4년 만의 복귀로 주목받고 있다. ‘에쿠우스’의 주인공인 알런은 류덕환 외에도 트리플 캐스팅으로 구성됐는데, 이중 서영주는 전 세계에서 최연소 나이로 알런 역에 캐스팅돼 화제를 모은 적이 있는 배우다.

류덕환과 서영주, 오승훈이 연기하는 주인공 알런에게 있어 아버지의 위엄을 제공하는 이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다. 어릴 적 해안가에서 만난 말(馬)이 알런에게 있어 아버지의 권위를 제공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관점에서 볼 때 한 남성이 정상적인 어른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권위를 극복하고 넘어서야 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에 위축되거나 극복하지 못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온전하게 극복했다고 보긴 힘들다.

‘에쿠우스’는 알런에게 아버지의 권위와 동격인 ‘말’을 넘어서고자 했으나 넘어서지 못했을 때의 비극을 말의 눈을 찌른다는 설정으로 묘사한다. 아버지의 권위를 넘어서고 싶었으나 결국엔 그러지 못하는 소년의 비극으로 말이다.

연극 <에쿠우스> (사진제공=극단 실험극장)

이를 뮤지컬이라는 외연으로 확대하면 오스트리아 뮤지컬 ‘모차르트!’가 ‘에쿠우스’와 유사하다고 분석할 수 있다. 연극은 말의 눈을 찌른 소년의 이야기인데, 모차르트의 일대기를 다룬 오스트리아 뮤지컬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흔히들 모차르트를 일컬을 때 ‘신동’이란 표현을 쓴다. 모차르트가 어릴 적부터 음악적 신동이란 칭찬을 들을 수 있던 연유는 그의 음악적인 재능이 워낙 탁월했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모차르트의 재능이 다였을까.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모차르트의 재능은 아버지의 교육열이 뒷받침했기에 가능했다. ‘재능’에 ‘교육’이 더해진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음악적 업적으로 남을 수 있게 됐다.

뮤지컬에선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지만 레오폴트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생업을 등한시했다고 한다. 레오폴트는 최소한의 생업 활동만 유지하되 나머지 열정은 아들의 교육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고 한다.

뮤지컬 <모차르트!>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하지만 아버지 레오폴트의 극성에 가까운 교육열은 아들인 볼프강에게 있어 극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안겨줬다. 성인이 되면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지만,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위엄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아버지 레오폴트가 서거한 지 4년 뒤에 아들인 볼프강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숨을 거두었을까.

아버지의 위엄이 사라진 뒤엔 아들이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게 맞다. 하나 모차르트는 레오폴트의 권위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4년 뒤 생물학적 종말을 맞이했다. 모차르트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그늘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컸음을 뮤지컬 ‘모차르트!’ 및 모차르트의 실제 일대기가 보여주고 있다.

연극 ‘에쿠우스’도 마찬가지다. 말이라는 아버지의 권위를 어떻게 해서든 극복하고 싶었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여섯 필의 말의 눈을 찌르는 알런의 극 중 모습은, 말이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할 때 어떤 비극이 태동하는가를 마구간의 비극을 통해 강렬하게 제시한다.

연극 ‘에쿠우스’와 뮤지컬 ‘모차르트!’는 주인공이 말 또는 레오폴트라는 아버지의 권위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관객에게 제시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하나 더, 여섯 필의 말의 눈을 찌른 소년과, 레오폴트와 모차르트의 부자 관계는 만들어진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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