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전격 해임되면서 북미대화의 돌파구가 다시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은 애초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여하기로 했던 유엔총회에 계획을 바꿔 직접 참석하기로 했다. 북핵 협상 과정에서의 중재자 내지는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본 것이다.

존 볼턴의 후임으로 로버트 오브라이언 인질문제 담당 대통령 특사가 기용됐다는 사실은 좀 더 희망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신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외교가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 2012년에 미트 롬니 캠프와 2016년 테드 크루즈 캠프에서 고문 역할을 했고 존 볼턴이 유엔대사를 맡았던 시절 함께 일한 일도 있다지만 무게감 있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존 볼턴과는 달리 사교적인 인물이라 돌발적인 사고가 일어나거나 이견이 외부로 노촐될 우려가 없다는 게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선택된 이유일 거라는 추측이 많다. 일하는 스타일에 있어서는 존 볼턴과 반대지만 대외정책에 관한 노선에 있어서는 트럼프 행정부와 코드가 맞는다는 점도 물론 중요하게 고려됐을 것이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국가안보보좌관은 중국의 부상을 최대의 위협으로 보고 있으며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 핵협상에 대해선 2차대전의 도화선이 된 뮌헨 협정에 비유할 정도로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이 ‘미국이 잠자는 동안(While America Slept)’라는 점은 그가 전형적인 공화당식의 외교안보노선을 가진 인물이라는 걸 짐착할 수 있게 한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대북문제에 있어선 로버트 오브라이언 국가안보보좌관의 역할이 제한적일 거라고 보는 시각이 다수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국가안보보좌관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측근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지만 이미 대북협상은 국무부로 중심이 쏠려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국무부 부장관을 겸직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시각을 뒷받침 한다. 스티브 비건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가안보보좌관 후보군으로 거론될 정도로 무게감 있는 인물이 된 상태다. 따라서 대북협상은 폼페이오-비건 라인이 주도하게 될 것이고 미국의 외교안보정책은 ‘폼페이오 원톱’ 체제가 됐다는게 미국 언론 등을 통해 나오는 평가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 대해선 북한이 비난을 퍼부으며 ‘선수 교체’를 요구한 일도 있지만 존 볼턴에 비할 바는 아니다. 특히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는 그동안 실무협상의 책임자로서 유연한 태도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이 역시 포스트 존 볼턴 체제에서 북미협상이 잘 이뤄질 것으로 전망할 수 있도록 하는 요인이다. 한국으로선 기대감을 가질만 하다.

그러나 시선을 중동으로 옮겨 보면 쉽지 않은 일 투성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아프가니스탄 철군은 탈레반을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한다는 구상이 언론에 유출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실현이 어려워졌다. 이란과 새로운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도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 석유 시설에 대한 드론 공격을 감행하면서 희미해지고 있다.

미국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애초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총회에서 하산 로하니 대통령을 만나 제재 해제를 포함한 새로운 딜을 만들어 본다는 계획도 갖고 있었던 걸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일어나면서 오히려 “더 강력한 제재”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트럼프 대통령은 “장전완료”를 외치면서도 군사적 대응은 되도록 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미국 내 강경파들은 이 점을 근거로 트럼프 행정부의 무른 대응이 이란의 ‘전면전’ 언급과 같은 강경한 태도를 허용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트럼프 행정부도 군사적 압박 수위를 더하는 일이 불가피하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국가안보보좌관도 이 대목에 있어서는 강경한 목소리를 낼 것이다. 이에 따라 호르무즈 해협 연합 방위 체제 참가 압력도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태도가 아니더라도 이미 한국은 중동 정세에 군사적 경제적 차원에서 연관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문재인 대통령은 18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의 통화에서 석유시설 공격에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면서 복구 작업에 참여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무함마드 왕세자 측은 대공방어시스템 등 군사적 협력 필요성을 언급했다고 한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석유 의존을 줄이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6월 방한해 국내 주요 대기업들에게 관련 사업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후티 반군의 드론 공격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삼성물산이 수주한 지하철 공사 현장에 있었던 것도 양국의 경제적 협력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문제와 관련해 특별히 무함마드 왕세자와 전화통화를 한 이유도 크게 보면 이와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관련 시설을 공격한 후티 반군들은 북예멘 지역에 기반을 갖고 있는 시아파 근본주의 세력으로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남예멘의 분리주의 세력과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은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권 안에 있다. 한국은 앞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외에도 아랍에미리트와 군사적 협력 관계임을 수차례 확인한 바 있다.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재선을 위해 대외정책의 성과가 절실한 트럼프 대통령의 어려움을 우리가 활용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 사실이다. 어차피 중동에서 성과를 내기 어렵다면 대북협상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연한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북한 비핵화 협상에서의 일보전진은 트럼프 행정부라는 조건에선 중동의 혼란을 방치하는 근거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한국으로선 중동 정세 불안정의 대가로 북핵문제 해결 가능성을 얻게 된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최소한의 윤리의식이 필요하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의 이란 압박에 동참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중심 구도에 더욱 더 편승하는 것에 대해 윤리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멘 내전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강대국들의 개입이고 미국과 그 동맹국들도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부 한국 사람들은 내전을 이유로 제주도까지 도망 온 예멘 난민들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워했고, 한국 정부는 이들의 난민 인정 비율을 최소화하기 위해 엉터리 심사를 감행했다. 호르무즈 우회 파병(?)은 거의 기정사실이다. ‘포스트 존 볼턴’ 정국에 시민이 내야 할 목소리는 어떤 것일지 고민이 필요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