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봉준호 감독이 처음 구상한 <살인의 추억> 엔딩씬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도시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봉 감독은 첫 구상이 상투적이라며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 정면을 바라보는 두만(송강호)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 것으로 엔딩씬을 바꾼다.

봉 감독이 상투적이라고 말한 엔딩씬의 대표작은 아마 <양들의 침묵>일 것이다. 탈옥에 성공한 한니발 렉터 박사(안소리 홉킨스)는 승진축하파티 중인 스털링(조디 포스터)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 식사로 옛친구를 먹어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하얀정장을 깔끔하게 빼입은 렉터박사는 천천히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카메라는 줌아웃 된다. 마치 먹잇감을 찾아 양떼 사이로 숨는 늑대처럼.

지난 늦봄에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든 건 제주도 어느 펜션에서 전 남편을 무참히 살해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실행했다고 추정되는 잔혹한 범죄 방법은 언론을 통해 24시간 방송됐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시체를 조각내고 믹서에 갈아 여행용 가방에 옮겼다는 추정. 범죄현장을 청소하기 위해 샀던 표백제를 마트에서 환불하는 장면을 굳이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마트종업원의 인터뷰까지 따가며 하루 종일 친절하게 범죄방식을 설명하는 언론보도는 동일(혹은 유사)범죄를 계획 중인 불특정인에게 모범적이고 효율적인 범죄계획을 교육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의문이 들 정도다.

더 큰 의문은 피의자의 신상공개다. 피의자는 신상공개를 극도로 거부했지만 호송과정에서 언론의 집요한 취재로 얼굴이 공개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피의자는 이후 수사에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신상공개를 통해 제보를 들을 수 있다고 하지만 범죄와 가장 가까운 당사자가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수사에 이득이 되긴 하는지 의문이다.

또한 평생 교도소 밖으로 나올 일 없는 형량이 구형될 확률이 높은 강력 범죄자의 얼굴을 일반시민들이 알아서 얻는 이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장 어제 점심에 김치찌개 시켜먹은 식당의 종업원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생업으로 바쁜 평범한 현대인이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지점은 범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다. ‘식인을 즐기는 렉터 박사’처럼 평범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만 범죄를 저지르는 건가. 렉터 박사처럼 군중 속에 숨어 있는 이질적인 존재를 색출한다면 범죄청정지대가 되는 걸까.

당연히 아니다. 범죄는 유전자처럼 인간에게 각인된 게 아니라 주변 환경에 의해 서서히 누적되다가 특이점을 맞이한 순간 폭발하기도 한다. 누구나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피의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범죄예방을 위한 제도개선과 환경정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동진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봉 감독이 밝힌 <살인의 추억> 엔딩신의 콘셉트는 ‘과거의 화살’이다. ‘과거의 화살’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는 스크린 너머에 있을지 모를 범인에게 쏘는 것이다. 2019년 9월 18일. 무려 33년 만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를 특정할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 이미 성폭행 후 살인혐의로 1994년부터 25년째 복역 중인 무기징역수였다.

범인이 분명 <살인의 추억>을 봤을 거라는 봉 감독의 직감은 빗나갈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대한민국 3대 미제를 향해 날아간 첫 번째 화살은 ‘범죄자는 언젠가 꼭 잡아 낸다’는 정의로운 의지가 되어 렉터 박사처럼 시민 사이에 숨어든 범죄자들의 마음에 꽂혔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살인의 추억>의 가장 큰 성취는 '악의 평범성'을 뛰어넘어 '악의 편재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는 점이다. 그래서 <살인의 추억>이 쏘아올린 두 번째 화살이 중요하다. 이 화살은 과거의 비극을 잊고 평범한 시민이 된 두만의 미간에 꽂힌다.

하지만 이 두 번째 화살의 궤적은 영 개운치 않다. 영화 속에서 두만의 얼굴을 기억하며 선량한 시민을 자처하는 우리와 알권리를 추구한다는 언론이 반인륜적인 범죄를 겪을 때마다 날린 ‘과거의 화살’들은 결국 어디로 향했는가 반추해 보자. 우리들의 미간에 날아들어 범죄자는 아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일깨우는 대신 혹시 이미 수감된 살인마들을 확인사살 하는 데 낭비되고 있지는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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