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뭔가를 덮기 위해 무슨 뉴스가 나왔다고 하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톱스타의 열애설 등 대중적 관심이 집중되는 일이 보도되면서 국민의 실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부의 조치나 어떤 결정이 가려지고 있다는 논리다.

이러한 ‘음모론’의 동력은 대개 다음과 같은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정보와 관심의 비대칭성이다. 바쁜 오늘을 살며 ‘엔터테인먼트’로 스트레스를 푸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연예인에 대한 정보는 잘 알고 있지만 정부 정책이나 여의도 정치와 관련한 복잡한 맥락엔 무관심하다. 관심이 있더라도 제대로 알 방법이 없거나 그럴 여력 또는 시간이 없다.

복잡한 맥락을 제거한 정보들 끼리는 오히려 서로 인과관계를 만들기가 어렵지 않다. 까마귀가 날고 배가 떨어졌다고 하면 까마귀가 배를 떨어뜨렸다는 인과관계를 만드는 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까마귀가 앉은 나뭇가지의 구체적 위치나 배가 떨어진 순간의 풍속 및 풍향, 배 나무 줄기의 함수율 등의 정보가 추가되면 이런 인과관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이러저러한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에 찬 진술은 늘 경계해야 한다.

둘째는 인터넷이라는 물질적 기반이다. 인터넷에서는 관심이 곧 자본이다. 유튜브를 보라. 그럴듯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면 순식간에 공유가 되며 퍼져 나가고 이게 결과적으로는 어떤 이득의 발판이 된다. 이렇다 보니 반은 재미로 반은 어떤 기대로 ‘음모론’을 만들어 유포하는 사례가 많다. 이 정부가 증오하는 ‘가짜뉴스’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재생산된다.

셋째는 정치적 목적성이다. “‘뭔가’를 덮기 위해 ‘무슨 뉴스’가 나왔다”고 하는 음모론은 대개 ‘뭔가’로 관심을 돌리면서 ‘무슨 뉴스’의 주목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뭔가’와 ‘무슨 뉴스’의 중요성을 각기 주장하는 집단 사이에 경쟁 구도가 성립하기도 한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인류의 ‘집단지성’은 이런 식으로 활용된다.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정부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종료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지키기’로 규정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정권이 조국 후보자 관련 논란을 덮기 위해 지소미아를 파기하는 뉴스를 만들어 낸 것 아니냐는 것인데, 조국 후보자 논란은 잘 알아도 지소미아 관련 정보는 제한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는 대중의 상태를 ‘가짜뉴스’ 플랫폼들과 함께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전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청와대가 NSC회의를 열어 장시간 논의한 결과가 조국 후보자 논란을 덮기 위해 지소미아를 연장하지 말자는 것이라는 주장은 누가 봐도 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자유한국당이 얻을 수 있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로 조국 후보자 관련 의혹 제기를 더 이어갈 수 있다. 둘째로 지소미아 관련 입장으로 전선이 옮겨지면 ‘친일 대 반일’ 구도가 부활해 불리한 입장에 처할 수 있는데 “조국 살리려 지소미아 파기했다”는 논리는 이 국면을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관련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 회의 내용을 보고받고 있다. (연합뉴스)

지소미아 파기가 의외의 결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언론은 22일 오전까지만 해도 지소미아 연장이 유력하다고 봤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일본에 사실상 대화 여지를 열어두는 등의 제스추어를 취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2일 NSC회의를 거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전날 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일본의 태도 변화가 감지되지 않고 있다는 게 결정의 배경이 된 걸로 분석된다.

그동안의 맥락으로 봐도 지소미아 파기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명박 정권 시절 논의가 시작돼 박근혜 정권에서 체결된 이 협정은 철저히 한미일 동맹의 강화라는 맥락에서만 한국에 이익을 안길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의 안보적 중요성을 축소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입안하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며 동시에 남북관계의 진전이 모색되는 상황 속에선 이 협정과 관련한 ‘국익’을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거기에 일본이 수출 규제의 근거로 전략물자 관리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 및 안보와 경제를 분리하자는 전통적 개념은 이미 해소됐다. 따라서 이 국면에서 지소미아 파기는 불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정부는 미국과도 긴밀한 협의를 거쳤고 나름대로 양해를 얻어냈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상황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한국 결정에 실망했다”고 말하고 미 국방부도 “강한 우려와 실망감을 표명한다”는 논평을 내놨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근거로 보수야당의 공세에도 다시 불이 붙을 수 있다. 조국 후보자 논란을 넘어 한미동맹 훼손에 관한 문제제기로 프레임을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야당의 시각과는 달리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판단은 이 정부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다. ‘가짜뉴스’들이 주장하는대로 문재인 정권이 남북관계 때문에 미국을 버리고 중국에 투항(?)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오히려 지금 국면은 한일 양국이 미국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서로의 편으로 끌어 당기는 형국이다. 예컨대 한국은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 국면에 대해 미국이 중재에 나서기를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지소미아 파기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미온적인 수준에서 강경해진 것에는 일본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팔을 다시 한 번 잡아당기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언론은 대략 두 가지 쟁점에서 미국의 압력이 강해질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첫 번째는 방위비분담금 협상이고 두 번째는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사실상의 파병이다. 이미 정부는 방위비분담금 협상에선 최대한 방어하고 파병을 현실화 하는 방식으로 백기를 들 준비가 다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보수야당도 못 이기는 척 박수를 칠 것이다.

하지만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군사행동이라는 카드에 손을 대는 행위에 과연 명분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것보다는 본질적 문제를 말할 필요가 있다. 지소미아가 결국 일본에겐 재무장과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같은 맥락에 있다는 점 말이다. 이것은 민족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평화군축이라는 가치의 문제이다. 즉, 지소미아 파기는 일본에 대한 민족적 복수가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 체제를 위한 한 걸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소미아 파기를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낸 정치세력들이 과연 그런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인지 되돌아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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