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일본 참의원 선거 결과 연립 여당이 과반을 넘는 성과를 냈지만 개헌에 찬성하는 세력이 3분의 2 의석을 점하는 것은 어렵다는 분위기라고 한다. 하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마지막 임기 내에 개헌 논의를 실질적으로 마무리 짓겠다는 자민당의 태도는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출 규제 문제를 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수출 규제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정치세력 및 기업이 각자에 유리한대로 이용하는 국면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번 일본 참의원 선거 개선의석은 124석인데 이 중 자민당은 57석, 공명당은 14석을 얻었다고 한다. 연립여당인 두 당이 기존에 갖고 있던 70석을 합치면 141석이고, 이는 참의원 전체 의석 123석을 넘는 수준이다. 하지만 개헌 찬성 세력이 확보한 의석을 모두 합치면 160석 정도로 개헌안 발의를 위해 필요한 164석에는 미달한다. 아베 신조 내각이 안정적 정권 운영을 위해 필요한 의석을 재확보해 대외적으로 내건 목표는 달성했지만 실질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베 신조 내각이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등으로 ‘외부의 적’을 만들어 강공을 편 것이 선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다만 이전까지 아베 신조 내각에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던 금융청 보고서 문제나 소비세 인상 등의 쟁점이 가려지는 효과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이렇게 보면 참의원 선거 이후 아베 신조 내각이 수출 규제 문제에서 나름의 출구전략을 모색하는 것도 불가능해보이진 않는다. 아베 신조 내각이 수출 규제를 강행하는 의도에 대한 분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참의원 선거 대응 및 개헌 여론 점화, 둘째는 한국 반도체 산업 성장에 대한 견제, 셋째는 북미관계의 진전에 따른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의 영향이다.

그런데 세 가지 경우 모두 반드시 수출 규제로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다. 또 여러 언론이 지적하듯 지금과 같은 형태의 수출 규제는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다 일본 기업에도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 출구 전략에 시동을 거는 것이 일본으로서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손뼉도 양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여기에서도 우리 정부가 이후 어떤 전략을 갖고 임하는지가 중요하다. 대략적인 시간표는 이미 나와있다. 이번달 말까지 일본 정부가 강공을 펴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른바 ‘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기 위한 정령 개정 의견 수렴 절차가 24일까지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일 간에 문제 해결을 위한 결정적 계기가 실제로 마련되려면 최소 8월 말에서 9월은 되어야 한다. 9월 초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에 이낙연 총리가 참여해 아베 신조 총리와 만나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참의원 선거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이 청구권 협정 위반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가져오지 않으면 건설적 논의가 안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 정부의 이른바 ‘1+1안’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재확인하면서 일본 정부가 '새로운 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에 반론을 편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의 태도는 당분간 양국 간의 대안 논의가 평행선을 달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정부가 제안한 한국과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공동출연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는 안과 이를 한국 정부가 책임지는 안이 이미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다는 점에서, 이 사이에서 양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해 발전시킨 안으로 논의가 이어질 가능성이 역시 크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1일 자민당본부 개표센터에서 당선자 이름에 장미꽃을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한일 간의 갈등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보통국가화는 단지 ‘전범 정치인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라는 개인의 지향을 통해서만 관철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국가화라는 정치적 프로젝트에는 천황제를 근간으로 하는 과거 군국주의 체제의 부활을 연상케하는 흐름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또 한편으로 일본이 국제질서에서 자신의 위상에 맞는 군사적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논리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후자의 경우는 이른바 ‘리버럴’에 속하는 정치 세력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아베 신조 내각이 추진하는 개헌이 애초의 자민당안에서 후퇴해 자위대 보유 근거를 명기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은 두 입장의 공통분모를 찾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일 간의 갈등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청와대에서 열린 5당 대표 회담에서 말한 것처럼 “어차피 한 번 건너야 할 강이고 넘어야 할 산”이라면 일본의 보통국가화에 반대하는 논리를 더 정교하고 세련된 형태로 만들어 제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본과 과거 식민피해국들 간의 힘 겨루기라는 구도가 아니라 전쟁의 비극을 반복할 이유가 없다는 반전평화의 정신을 중심에 놓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같은 인사들이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판결 내용을 설명하면서 친일파, 매국, 이적 등의 단어를 동원하고 있는 것은 우려스럽다. 보수세력이 ‘친일이냐 반일이냐’ 구도를 만들어 총선에서 유리한 입지를 구축하겠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가지는 것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 실제로 청와대가 강경한 대일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이 정부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분식회계 등을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는 삼성 바이오로직스의 대표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은 최근의 이런 분위기가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장이 기각된 직후 검찰은 영장실질심사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 측이 일본의 수출 규제를 근거로 들며 바이오 산업의 위기 등을 호소했다고 언론에 밝혔다. 조선일보가 22일 이 사안의 핵심을 완전히 왜곡한 사설로 삼성 측을 지원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의 정부, 국민, 기업이 하나로 뭉쳐 일본의 ‘경제침략’을 이겨내자는 주장이 재벌의 꼼수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비극은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군국주의와 호응하면서 나타났다. 최근의 국내 분위기는 ‘당하는 쪽’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이 지면에서도 수차례 언급했지만 최근 정부가 반도체 등의 소재 국산화를 위해 화학물질 규제를 한시적으로 완화하고 관련 연구개발 분야에 특별연장근로를 인정하겠다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한 것도 여기에 해당되는 사례이다. 누가 이런 지적을 하면 가르치지 말라거나 훈계하지 말라는 반응부터 나오는 여론 지형도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일본 정부의 폭주에 단지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잔재와 제대로 싸우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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