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늙수레한 과수원 사장님이 1톤 트럭 한 가득 나무를 싣고 와서 구룡마을 상사원(원불교 최고지도자가 퇴임 후 주재하는 공관) 마당에 부렸다. 겨울 사과나무 가지치기 부산물이다. 땔감으로 쓰면 은은한 사과 향이 난다고 했다.

먼저 기계톱으로 땔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토막 냈다. 그리고 허연 입김을 불어가며 도끼질을 했다. 옹이가 많아서 쉽게 빠개지지 않았다. 길찍하게 팬 장작개비를 바람이 잘 통하도록 차곡차곡 창고 벽면에 재었다. 괜찮은 장작은 따로 갈무리해서 미리 자루에 담아뒀다. 화물로 보낸다고 했다. 배송지는 세계 굴지의 재벌 A그룹 총수 자택이었다.

VIP 교도를 향한 살뜰한 정이란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홀연히 일어난 한 사건에 대한 기억이 분노로 휘몰아쳐 사정없이 나를 쓸어버렸다. 오랜 시간 동안 A회사를 곱게 바라볼 수 없었다. 쏟아지는 각종 뉴스 속에서 부정적인 부분만 골라 들었다. 비자금, 회계부정 등등의 사건이 그러했다.

“우리의 마음 바탕에는 원래 요란함이 없지만, 경계를 따라 능히 요란하기도 하나니,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요란한 마음이 본래는 없다는 걸 알아차려 흩어버림으로써,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정의와 불의, 이익과 손해 앞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힘을 얻자”

밝아오는 새날을 맞이하며 매일을 하루 같이 큰 소리로 읊는 독경 첫 구절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부처를 닮은 마음으로 살고자는 다짐이 배어있다.

하지만 십 년 수행이 무색하게도 이런 굳은 각오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강적이 있으니 A는 나에게 그런 존재이자 경계다. 폭탄에 연결되어 건드리면 자동으로 폭발하는 가느다란 철선과 같다. 언론에 등장하는 A의 소식은 끊임없이 나의 과거를 소환했고 나약한 나는 감정에 못 이겨 맥없이 이성을 상실하기 일쑤였다.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진다. 내 머릿속 A와 현실의 A는 같을까? 내 머릿속 A는 기억과 경험 그리고 입맛에 맞게 선택한 정보를 먹여가며 길러낸 괴물은 아닐까? 내 분노는 내 머릿속 A의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을까?

저녁 햇살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밤이 내리면 그림자는 칠흑 속에 스러지고 말 것이다. 그래 그렇다. 그림자는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일삼을 뿐 영원하지 않다. 다시 내일의 태양이 뜰 때 내 슬픈 그림자에 매몰되지 않는 나이기를 기도한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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