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오늘날 부자와 빈자는 어디에 있는가? 매스미디어가 보여주는 현실은 사회 전반을 제대로 비춘다고 말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매스미디어가 이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표준적 삶’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만, 대개 그것은 중산층적 욕망이 빚어낸 산물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부자와 빈자의 진짜 삶은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 후자는 땅 밑의 비루한 삶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전자 역시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 안에 어떤 형태로든 접근해야 알 수 있다. 때문에 부자와 빈자의 삶은 특별한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섞일 이유가 없다. 이것이 각자의 분수, 즉 선을 지키며 사는 것이 미덕인 사회의 모습이다.

서울의 한 영화관 (연합뉴스)

<기생충>은 이 구조에 대한 영화이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의 가족과 화려한 저택에 살고 있는 박사장 일가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들여다 볼 이유가 없는 조건에서 살고 있다. 사건은 기택의 아들인 기우가 중산층적 욕망을 갖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기우의 친구인 민혁이 선물이라며 가져 온 수석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정체성을 달리한다. 다시 말하자면 보는 사람의 욕망이 투영되는 존재인 셈이다. 기우는 이 수석을 통해 안정적 일자리와 전형적 이성관계라는 ‘표준적 삶’을 욕망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 기택은 이런 기우를 “난 네가 자랑스럽다”며 격려한다.

기택의 가족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박사장의 공간에 진입하고, 여기서 부자들이 만든 사회의 일원이 된 양 중산층적 삶을 재현한다. 박사장의 가족이 캠핑을 떠난 사이 양주를 섞어 마시면서 미래의 사돈 운운하며 집 주인 행세를 하는 기택의 모습은 행복해 보이지만 위태로운 느낌인데, 이 위기감은 이들이 선을 넘은 것, 즉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벌인 것에서 온다.

빈자들이 계급적 각성이 아니라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따르며 얻게 된 기만적 행복은 박사장 가족이 예정보다 빨리 귀가하면서 산산조각 난다. 기택의 가족들이 마치 불빛을 피해 숨어버리는 바퀴벌레처럼 재빨리 자신의 원래 자리를 찾아 가는 도중에 만나는 것은 그들 자신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던 반지하 방에서조차 살 수 없는 이의 삶이다.

거대한 저택의 지하에서 그야말로 ‘기생’하고 있는 문광과 그의 남편은 박사장을 비롯한 기득권을 찬양하면서 기택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집 주인이 없을 때 집 주인이 된 양 행동한다. 또, 이들이 예술을 모른다는 이유로 기택의 가족들에게 핀잔을 주고 자신들의 삶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대북정책을 소재로 한 농담을 즐긴다. 가장 불행한 사람조차 중산층의 욕망을 이미 내면화하고 있는 셈이다.

박사장 일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택의 가족들과 문광 부부는 제한돼 있는 ‘기생충’의 지위를 놓고 아귀다툼을 벌인다. 기택의 가족들은 잠시나마 저택 지하의 문광 부부와 자신들에 의해 밀려난 윤 기사에 대해 연민을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할 일에 열중하느라 이런 감각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는 영화 후반부에 벌어지는 파국의 한 원인이 된다. 부자들이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바로 발 밑에서 자기들끼리 다투던 빈자들은 결국 서로 죽고 죽이는 지경이 되어 구이용 꼬챙이에 꿰인 고깃덩어리가 돼서야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억울한 신세가 되는 것은 남성 등장인물들의 삶을 보조하거나 이들의 계획에 가장 충실했을 뿐인 여성들이다.

파국의 또다른 원인은 빈자들이 즉자적인 방식으로 계급적 각성을 이룬 것에서 온다. 기택은 자신들을 모욕하는 박사장의 태도와 폭우로 인한 피해를 통해 중산층적 허위의식에 가려져 있던 계급적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박사장의 ‘냄새론’으로 드러나는 생리적 불쾌감, 본능적 혐오는 부자와 빈자가 함께 있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일깨워 준다. 반지하 방의 침수와 대비되는 박사장 가족의 미세먼지 타령은 부자와 빈자의 이해관계가 결과적으로 상충된다는 진실을 깨닫게 한다.

이재민들을 위한 임시 대피소에서 기택과 기우가 보이는 태도는 오늘날의 노동계급이 어떤 딜레마에 빠져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노동계급에게 허용된 선택지는 계급적 진실에도 불구하고 중산층적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계획이란 어차피 세워봐야 실패하니 계획이 없는 상태로 있겠다는 염세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뿐이다. 전자를 선택한 기우는 저택 지하의 룸펜에게 자신을 중산층적 욕망으로 이끈 수석을 전하려다 오히려 이 때문에 해를 입는다. 후자를 선택한 기택은 부자를 향한 테러라는 일회적 파국에 휘말리고 반지하조차도 못 되는 저택 지하에 숨어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끔찍한 파국을 경험한 기우는 수석을 애초에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되돌려 놓고 아버지를 구할 근본적 해결책을 모색하기로 한다. 그것은 역시 돈을 벌어 저택을 소유하고 지하에 갇힌 아버지를 그저 걸어 올라오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 대한민국의 대다수 젊은이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갖는 욕망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가 익히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매우 높은 확률로 실현되지 않는 비현실적 바람이다. 저택을 구입하고 행복한 삶을 재건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기우가 편지를 쓰는 곳이 여전히 반지하 방인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 되돌아 보는 것은 오늘날 기택의 가족과 같은 현실에 내몰려있는 빈자들의 정치적 현실이다. 오늘날의 빈자들은 자기들끼리 혐오하고 싸우는 것으로 기득권에 대한 근본적 저항을 대신한다. 부자들에 대한 일반적 반감은 극우정치를 지지하는 등 일회적 테러의 방식으로 정치화 된다. 이는 반정치적 방식으로 영겁회귀하는 엘리트주의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는 또다른 반동을 낳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문제의 정치적 해결이 어렵기 때문에 돈을 벌어서 스스로 부자가 되는, 각자도생의 논리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등장한다. 각자도생의 논리는 다시 시장 논리와 결합해 공정한 시장 경쟁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로 되돌아 온다. 인간은 스스로 상품이 되어 자신의 운명을 자본에 내맡긴다.

기택의 가족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박사장 일가의 저택이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지부터 생각해보자. 박사장 일가는 유명 건축가가 지은 저택을 구입해 소유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박사장이 실토하는 대로 이들은 집안일을 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일주일도 버티지 못한다. 저택을 중심으로 한 어떤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기택 일가이든 또는 윤기사와 문광이든 빈자들의 노력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군다나 박사장 일가는 저택 지하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선 아예 알지도 못한다. 바퀴벌레로 스스로를 묘사하는 빈자들이 저택의 실제 모습을 더 잘 알고 있다. 이 영화를 현실적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정치적인 우화의 방식으로 이해하면 저택이라는 공간은 사실 등장인물 모두의 것인 셈이다.

따라서 기택의 가족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박사장 일가에 그저 기생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자신들의 지분을 요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물론 무계획이 아니라 계획이 있어야 한다. 이 계획은 중산층의 욕망에 스스로를 동일시하거나 부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저택의 소유권을 차지하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영화적 연출이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저택을 점거하고 박사장 일가를 무장해제시키는 데까지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통한 선전 선동은 옳지 않다”고 했는데, 이것이 이 영화가 이런 결말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일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이 영화를 일종의 미메시스적인 시도로 본다면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기택의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계획을 마련해주는 일을 누군가는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갖는 실패의 경험이 어떤 반격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가를 논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를 <기생충>과 같은 방식으로 표출한다. 기택의 가족들이 그런 것처럼 우리에게도 제대로 된 계획이 필요하다. 현실세계에서 그것은 말하자면 어떤 대안적 정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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