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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산처럼 무겁다

기사승인 2019.04.26  09: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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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해, 바다와 같아라]

[미디어스] 새벽 네 시 반. 알람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눈을 뜬다. 예비 교무 넷이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 이부자리를 갠다. 세수하고 편안한 옷을 걸친 뒤 선실禪室로 발을 옮긴다. 이내 멀리 원음각으로부터 어둠을 걷는 개벽대종 소리가 은은히 밀려온다. 

아침 좌선을 마치고 다 함께 서서 몸풀기 요가를 한다. 그런데 몇몇 남자 도반들의 자세가 왠지 어정쩡하다. 헐렁한 바지에 불끈 선 아랫도리가 도드라졌다. 선禪을 하면 생명 에너지가 몸에 차오르기 때문이다. 시들어 축쳐진 꽃이 물을 먹고 곧게 서듯, 좌선 후 발기는 이상할 게 하나 없다. 허나 여자 도반들 앞이라 민망했다. 

수양으로 북돋운 기운을 허투루 흘리지 말고 용맹정진의 힘으로 활용해야 하겠으나, 혈기왕성한 젊은 수행자들에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성욕이라고 뭇 사내들보다 덜하지 않다. 도리어 욕망을 꾹 눌러 참다가 한순간을 넘기지 못하고 크게 사고 치기 십상이다. 

방에서 막내였으나 늦깎이로 형 대접받던 나는 어린 도반들에게 원칙적인 말 대신 피하지 못할 상황에는 피임이라도 철저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지도교무 H는 이런 생각을 가진 나를 호되게 질책했다. 그만큼 승가僧伽는 성행위에 대해 보수적이다. 

저녁 7시 전에 예비 교무들은 기숙사에 돌아와야 한다. 저녁 일과가 시작된다. 둘러앉아 경전을 읽는데 P가 홀로 넋을 잃고 창을 향해 우두커니 섰다. 곁에 다가가자 흐느끼듯 말한다. “저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더 물어볼 수 없었다. 

그해 겨울에 P는 아빠가 되었다. 교단은 결혼 전에 딸이 생긴 예비교역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끝내 P는 기숙사에서 나가게 된다. 마지막 날 P는 농구장 구석에 앉아 나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들려줬다. 그를 떠나보내기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끝내 던지고 말았다. 

 “지울 수도 있지 않았나?” 

사진 출처 : pixabay.com

불교에서는 생명의 시작을 정자와 난자, 영식靈識이 더불어 만날 때로 본다. 3자의 온전한 결합은 이르게는 수정되는 찰나, 늦어도 배아가 자궁에 착상되고 4~6주 사이에 이뤄진다. 따라서 불가에서 낙태는 곧 살생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 그에게 한 질문이 아니었다. 

대학 중퇴생인 P와 이제 막 신출내기 간호사가 된 앳된 엄마가 도대체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가려고 출산을 결심을 했을까. 둘 다 넉넉지 않은 집 출신이다. 너무나 무모해 보였다. 독하게 마음먹고 임신중절을 했다면 이후에 과보가 어찌되건 들키기 전까지는 성직의 길을 그대로 갈 수 있었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덮을 수도 있었다. 이미 한국의 낙태율은 OECD국가 가운데 최고 아닌가.

“여자 친구가 아이 낳기를 원했습니다.” P는 애써 담담했다. 태아를 두고 대학생 커플이 겪었을 고뇌가 느껴졌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고 숱한 어려움을 감당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P와 그녀는 아이를 선택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P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처가살이 중이었고 또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닭 가공 공장에서 일하다가 칼날에 손을 베었다고 한다. 몹시 속상했다. 그러다 최근에야 처가댁에서 분가했다는 소식을 그는 나에게 들려줬다. 살림살이도 나아졌다고 한다. 딸내미는 곱게 잘 자랐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나는 안다. 모든 사람이 P와 그의 아내와 같지 않다는 것을. 세상에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내가 감히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는 가지가지 사연이 많다는 것을. 그래서 자기 몸을 찾아온 인연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던 분들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불제자로서 나의 역할을 할 뿐이다. 지난날 저지른 낙태로 인해 후회하며 힘들어하는 남녀나 산부인과 의사에게는 참회의식을 통해 과거에 지은 바를 반성하고 앞으로는 같은 업을 짓지 않도록 인도하며, 천도재로 태아영가와 그들 사이에 맺힌 원한을 풀도록 돕는다. 천도의식 과정에서 태아영가가 부처님 법에 의지해 새 몸을 받아 새 삶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복된 소식 아니겠는가.

그리고 만일 태중 아기를 떠나보낸 쇠약한 여인이 찾아온다면 불경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겁주기보다는 보약 한 첩을 지어주겠다. 그리고 만일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배속 아이를 떼려는 가난한 여인이 나를 찾아온다면, 그것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면, 돈이 없어 돌팔이 의사를 찾아가 몸을 다치지 않도록 내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돕고 싶다. 

물론 나는 살생의 방조자로서 업보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최선일진데 두려움은 별개 문제다. 삶과 죽음이 얽히고설킨 실타래에서 그 누구도 홀로 옳지 않다. 각자가 최선의 길을 고르되 짓고 받는 이치를 잊지 않는 우리였으면 한다. 삶은 산처럼 무겁다.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낙태는 본능적으로 의지하려고 하는 태아의 생명을 끊는 것이므로 살생과 다름이 없나니, 태아로 인해 산모가 생명을 위협받는다든가 할 경우에는 부득이 심고와 기도를 올리고 가족회의와 법적인 절차를 밟아 처리할 수는 있지만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요 원칙은 아니니라. 뱃속에서 천심으로 자라나는 생명을 죽이는 것은 보통의 살생보다 더 큰 죄가 되느니라.” - 원불교 대산종사법어 12:24

백종훈 원불교 교무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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