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요즘은 어딜 가나 버닝썬 사건 이야기다. 매일 같이 새로운 얘기들이 나오는데다 사람들의 관심도 폭발적이어서 말을 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물론 마음은 편치 않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연예인들을 동정하거나 아니면 다른 중요한 문제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사건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불편’이란 단어가 웃음거리가 된 세상이지만 또 쓰지 않을 수 없다. 버닝썬 사건에 대해 얘기하고 있노라면 꼭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김학의 전 차관이나 장자연 씨 사건 등 더 문제인 일이 많은데 왜 버닝썬 얘기만 하느냐는 것이다. 버닝썬 관련 보도가 많아지면서 이런 중요한 문제들이 “묻히고 있다”는 표현도 종종 나온다.

KBS 보도 화면 캡처

이런 인식은 버닝썬 사건과 김학의 전 차관 성접대 의혹, 장자연 씨의 억울한 죽음이 각각 다른 근본적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이 인식 속에서 버닝썬 사건은 더 중요한 문제들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김학의 전 차관 성접대 의혹이나 장자연 씨 사건의 경우는 힘 없는 여성이 짓밟힌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버닝썬 사건은 클럽에 출입하는 처신 가벼운 여성들의 어떤 ‘사고’에 불과한 사건 아니냐는 것이다. “동영상 촬영을 허용한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문장에 이런 가치판단이 집약돼있다.

이런 생각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여성을 사람이 아닌 어떤 물건으로만 보고 착취를 정당화 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연예인들의 단체 채팅방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약물 등이 동원 됐을 가능성까지 시사하고 있다. 백보 양보해서 피해 사례 중에 여성이 촬영에 동의한 것이 있다고 해도 이것을 동의없이 유포한 행위는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심각한 범죄인 것이다.

버닝썬 사건을 다른 사건과 분리하는 두 번째 논리는 검경수사권조정과 관련이 있다. 이런 시각은 다분히 음모론적인 것인데, 요약하자면 버닝썬 사건은 경찰에게 불리한 사건이고 김학의 전 차관 성접대 의혹이나 장자연 씨의 억울한 죽음은 검찰에게 불리한 일인데 이 중 하나만 택해 이슈화 하려는 것은 불공정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는 식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언론이 버닝썬 사건에만 열을 올리는 것은 수사권조정을 무력화시키려는 검찰의 음모에 춤을 추는 어리석은 일이다.

버닝썬 사건은 분명 수사권조정을 간절하게 염원해 온 경찰의 입장에선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다. 검찰은 이 사건으로 표정 관리를 하면서 하던 일을 더 열심히 하는 티를 내는 것 정도로 수사권조정 반대 투쟁의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할 수 있게 됐다. 민갑룡 경찰청장이 14일 국회에서 김학의 전 차관 성접대 의혹과 관련해 문제의 동영상은 당사자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무혐의 결론이 나왔다며 부실수사 책임을 검찰로 돌린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반격’일 것이다.

연합뉴스TV 보도 화면 캡처

요컨대 검찰과 경찰 모두 일련의 사건을 수사권조정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사기관이 머리를 맞대고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을 찾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오직 각자의 유불리를 따지는 것만이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냉소주의적 현실 인식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찰이냐 검찰이냐의 유불리를 떠나 과연 이 사건들이 보여주고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버닝썬 사건은 클럽이나 연예인과 유착 관계를 갖고 있는 경찰에 수사권조정이라는 선물을 안길 수 없다는 차원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수사권조정이 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란 필요에 따라 여성들이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는 것이다. 클럽을 운영하는 측은 남성 이용객들과의 만남을 주선한다는 명목으로 이를 조장 용인하면서 동시에 투자자 접대 등을 위한 수단으로 이런 상황을 활용하고 자기들끼리 불법촬영 영상을 찍고 올리고 보관하며 일탈을 즐겼다. 경찰은 이들의 위법과 일탈행위를 일상적으로 눈감아 주면서 정의 구현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몰두하였다.

이런 구조는 버닝썬 사건, 김학의 전 차관 의혹, 장자연 씨 사건에서 여성을 착취하는 사람들의 얼굴만 달리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바다. 이 과정에서 검찰과 경찰은 하나 같이 여성을 착취하는 편에 서서 직접 착취에 가담하고 수사를 무력화 하는 등 공범의 역할을 했다. 언론이 직간접적으로 이 구조에서 가해자의 역할을 맡게 된 것 역시 공통된 현상이다. 장자연 씨 사건에 조선일보 관련 인물들이 직접적으로 연루돼 있다고 한다면 버닝썬 사건에서의 언론은 관심과 조회수를 위해 피해자를 특정하기 위한 노력을 겨루는 게임의 장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힘을 보탰다. 즉, 이들 사건은 나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책은 검찰 또는 경찰에 이용당할까 전전긍긍하며 이들 중 어느 사건을 살리고 어느 사건을 ‘묻히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으로는 찾을 수 없다. 이 사건들은 각기 분리할 수 없고 모두 문제이며 이 사건들을 만든 구조를 발본색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 한 수사권조정이든 뭐든 ‘개혁’은 완료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진실을 다함께 말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왜 이건 말하면서 이건 말하지 않느냐”는 언어게임은 이 구조를 어떤 방식으로든 유지하자는 실천적 결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이걸 깨달을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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