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고인과 함께 했던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를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하고 제작환경 개선에도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

지난 8월 SBS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촬영 스태프가 내인성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초장시간 노동이 문제로 제기되자 제작진이 내놓은 입장이다. 그러나 SBS의 드라마 제작환경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또 다시 제기됐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SBS 드라마 '황후의 품격'(연출 주동민, 극본 김순옥)의 촬영시간이 하루 20시간을 상회하고 있다는 스태프들의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

이에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지부장 김두영)를 비롯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SBS 황후의 품격 공동고발인단'은 고용노동부에 SBS와 제작사인 SM라이프디자인그룹, 연출자인 주동민 SBS PD를 고발하고, 노동부의 '황후의 품격' 제작현장 근로감독을 촉구했다.

방송스태프지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돌꽃노옹법률사무소, 방송계갑질 119, 청년유니온, 언론개혁시민연대 등으로 구성된 'SBS 황후의 품격 공동고발인단'은 18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SBS와 SM라이프디자인그룹 고발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미디어스)

방송스태프지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방송계갑질 119, 청년유니온, 언론개혁시민연대 등으로 구성된 'SBS 황후의 품격 공동고발인단'은 18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SBS와 SM라이프디자인그룹 고발 기자회견을 가졌다.

고발인단은 기자회견장에서 스태프들의 제보를 바탕으로 구성한 지난 9월 17일부터 11월 30일까지의 '황후의 품격' 촬영일지를 공개했다. 일지에 따르면 하루 20시간이 넘는 촬영이 만연했다.

일지 내용을 살펴보면 10월 10일의 경우 새벽 4시 30분부터 시작된 촬영은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이뤄졌다. 29시간 30분동안 연속촬영이 이뤄졌다. 10월 17일부터 23일까지 일주일 간의 촬영시간은 117시간 20분. 11월 21일부터 30일까지는 휴일없이 10일 연속 촬영이 이뤄졌는데 열흘 간 촬영시간은 207시간에 달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SBS는 어제 공식 자료를 통해 "10월 10일 촬영의 경우 여의도에서 오전 6시20분 출발해 지방에서 다음 날 오전 5시58분에 촬영이 종료됐다”며 “여기에는 지방으로 이동하는 시간과 충분한 휴게시간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총 21시간 38분 근로시간이 됐다”고 밝혔다. 또 “1인당 4만원의 별도의 출장비도 지급되었으며 다음 날은 휴차였다”고 설명했다.

SBS 드라마 '황후의 품격' 촬영일지 (제공=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SBS가 내놓은 입장은 '우리는 하루 21시간 30분밖에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공식 시인한 것"이라며 "현행법 상 하루에 아무리 많은 노동을 시켜도 20시간 이상은 위법이다. 본인들의 위법을 자인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 노무사는 드라마 제작환경 노동시간을 '살인적'이라고 말했다. 김 노무사는 "고용노동부가 올해 초 발표한 과로사 지침에 따르면 예를 들어 한 노동자가 뇌출혈로 사망했을 때 쓰러지기 전 12주를 본다. 한 주 60시간 이상 일했을 경우 '일하다 죽은 것'으로 본다"며 "방송현장에서는 하루 20시간 넘는 노동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 노동부의 과로 인정 관련 고시에 따르면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발병 전 4주 동안 1주 평균 64시간)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업무와 발병과의 관련성이 강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1주 소정근로시간은 40시간이다. 당사자 합의하에 12시간 연장근로를 포함 52시간까지 노동이 가능하며 방송업종의 경우 올해 특례업종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내년 7월까지 68시간 노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는 주 100시간이 넘는 노동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고발장을 작성한 방송계갑질119 김수영 변호사는 "살려달라는 절규가 촬영일지에서 느껴졌다. 밥먹듯 위법한 장시간 노동이 이뤄졌다"며 "방송스태프들은 자신의 노동현실을 촬영기법에 빗대 '디졸브 노동'이라고 부른다. 사람을 죽이겠다는 것 아닌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디졸브'는 A장면과 B장면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화면 전환을 꾀하는 편집기법이다. 스태프들이 촬영 직후 마땅한 휴식이나 수면도 없이 다시 촬영에 임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자조섞인 표현으로 빗대고 있다는 것이다.

고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방송사의 변화만으로는 현장이 바뀌지 않는다"며 총괄연출과 메인작가가 제작환경 개선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사진=미디어스)

기자회견장에서는 방송사와 제작사 뿐 아니라 해당 드라마 PD와 메인작가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고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은 "방송사 경영진과 제작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지만 오늘은 총괄연출과 메인작가 분들에게도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며 "이분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촬영현장 개선에 앞장서지 않으면 절대로 현장을 변화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 이사장은 "김순옥 작가는 슬픔과 외로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슬픔을 잊고,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다"며 "그러나 정작 카메라 뒤에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망에는 관심이 없는 듯 시청률을 높이고 자신들의 명성을 높이는데 몰두하는 것 같다. 방송사의 변화만으로는 현장이 바뀌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드라마 제작 현장은 다단계 하청구조로 이뤄지는 게 대부분이다. 방송사와 제작사가 계약을 맺고 촬영을 진행하며, 다시 턴키계약·프리랜서 계약 등의 형태로 도급계약이 맺어진다. 방송사에서 총괄연출과 메인작가 등을 파견하면 이들의 지시에 따라 하청 제작진이 움직이는 구조다. 때문에 연출과 메인작가의 성향과 결정에 따라 제작환경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SBS)

고발인단은 노동부의 '황후의 품격' 제작현장 근로감독을 촉구했다. 노동부는 지난 3월 드라마제작환경개선 TF 요청에 따라 특별근로감독에 착수, 연출·촬영·제작·조명·장비·미술 분야 종사자 대부분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유권해석을 내놨다. 노동부가 대다수의 프리랜서·비정규직 방송스태프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한만큼 위법한 장시간 노동현장에 대해 근로감독을 실시해달라는 것이다.

김유경 노무사는 "당-정-청의 합의로 사용자 의사를 수용해 처벌유예기간이 생겼지만 노동현장의 위법한 상황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며 "처벌 유예기간이 며칠 남지 않았다. 노동부 스스로 방송 현장에 노동자가 존재한다고 시인한만큼 지금이라도 당장 나서 현장실태를 점검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발인단은 기자회견 직후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SBS, SM라이프디자인그룹, 주동민 PD를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고발하고, 청장 면담 신청을 접수했다.(사진=미디어스)

고발인단은 기자회견 직후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SBS, SM라이프디자인그룹, 주동민 PD를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고발하고, 청장 면담 신청을 접수했다. 고발장을 접수받은 서울노동청은 제작사인 SM라이프디자인 그룹을 상대로 고발장이 접수된 만큼 사건을 고양지청에 이관하고 고양지청에서 근로감독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지만, SBS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배봉관 서울지방고용노동청 노사상생지원과 상황실장은 "사건을 고양지청에 이관해 근로감독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면서도 "SBS에 대한 절차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제작현장에서 발생한 문제인 만큼 제작사 문제를 고양지청이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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