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화재, KTX 탈선, 태안화력발전소 사망 사고 등에 대하여 외주화, 민영화를 원인으로 꼽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런 주장에 거의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데 이런 진단에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노동자를 직접고용 했더라도 안전수칙 등을 지키지 않았다면 사고는 유사한 형태로 벌어졌을 거라는 얘기다. 일부 경제신문 등은 KTX 탈선 등을 놓고 오히려 공기업 체제에서 벌어진 사고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민영화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고용의 형태나 지배구조의 문제 자체가 예상하지 못한 사고나 산업재해 발생의 확률 상승과 직결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KT를 한국통신으로 되돌리거나 코레일과 철도시설공단을 철도청으로 다시 환원한다 하더라도 위험을 하청노동자에게 떠넘기며 사고가 발생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행태가 반복되면 오늘날과 같은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따져봐야 하는 것은 애초에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고 위험을 외주화하는 방식 자체가 고안된 맥락이 무엇이냐에 있다. 앞서 언급된 사고들의 당사자인 KT, 코레일, 한국서부발전은 국민의 정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민영화 정책의 결과물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주목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의 한복판 속에서 당선되었다. 당시의 위기는 단기적으로는 정부 대응의 무능으로부터, 장기적으로는 구조적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진단되었다. 여기서 구조적 문제란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형성된, 국가와 재벌이 손을 잡고 약자를 착취하며 효율적으로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모델이 정경유착과 중복과잉투자 등의 문제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 따라 김대중 정권이 내놓은 해법은 발전을 위해 좀 더 효율을 기하는 방식으로서의 시장주의에 기대 기존 모델의 해체를 가속화 하고 전면적인 경쟁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체제 이후에 기성의 관료들이 추진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여기서 국가가 관여하거나 주도하는 산업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비리와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되는 게 현실이었지만 여러 정치적 문제 때문에 방치되어 왔다고들 본 것이다.

따라서 이에 해당하는 기관이나 기업을 공정한 시장주의적 경쟁에 노출시켜 효율을 제고하기 위한 민영화 정책이 실시됐다. 민영화를 추진하기에 지나치게 규모가 큰 부문은 논란과 저항 속에서도 기능별로 분리해 단계적으로 민영화 하기로 했다. 한국전력이 5개의 화력 자회사와 1개의 원자력 자회사로 나뉜 것은 이 때문이다. 한전 민영화는 2009년 이후 완료될 계획이었으나 2002년 노동조합이 파업에 나서고 국민 여론이 악화되자 일정 수준에서 중단되었다.

철도 역시 국민의 정부에서 민영화의 기본 틀이 짜여졌으나 이 역시 강력한 저항에 휘말렸다. 이 때문에 참여정부는 시설과 운영을 분리하되 최소한의 공적체계 내에 철도를 남겨두는 선에서 민영화 정책을 중단했다. 보수정부는 동결된 민영화 로드맵에 다시 불을 붙였고 SR 분리라는 성과를 남겼다. 이런 일련의 기능 분할은 이번 탈선 사고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이 이미 나오고 있다.

1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숨진 김용균 씨를 추모하는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민영화를 통해 관철될 예정이었던 시장논리는 다른 정책적 수단들을 통해 실현되었다. 공공부문이 비용을 줄이고 위험을 회피하며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적극적 투자 유치로 적자를 해소하는 경영효율화를 일종의 대전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공공기관의 명줄을 잡고 있는 정부는 이를 기준으로 공공부문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압박했다. 이런 식의 행태는 소위 민주정부나 보수정부를 가리지 않고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시장논리를 내면화 한 공기업들은 발전자회사들의 실패한 해외 사업 수주처럼 엉뚱한 일에 손을 대거나 KT 처럼 문어발식 경영(?)에 도전하며 투자 여력을 낭비하면서도 사람과 안전을 위한 지출은 비용의 문제로 사고하게 되었다. 오늘날 공공부문에서의 사고가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을 향한 일상적 위협이 되는 현실은 이 결과이다. KT 아현국사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KTX가 선로에서 탈선하며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하청노동자가 비참하게 사망한 사건은 정확히 이 맥락 안에 있다.

아직도 시장화를 대안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은 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보장해 좀 더 안전한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주장을 내놓곤 한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시장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어떤 이상적 수준에 도달한 기업이 최종적 승자로서 등장하는 상상을 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이런 일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게 반복해서 확인된다는 점을 제쳐놓고 보더라도, 최소한 그 ‘시행착오’의 기간 동안 우리 중 누군가는 제한없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적자생존의 경쟁체제는 반드시 성공과 실패를 전제하는데 특히 공공부문에서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결과를 야기한다. 경쟁체제는 죽음을 먹고 자라는 것이다.

만일 손해와 위험을 오직 약자 또는 패배자에게 떠넘기는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원점에서 문제를 다시 사고해야 한다. 물론 상황을 1997년 이전으로 되돌리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국유화 일변도의 대책이 만능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과 안전에 들어가는 비용은 일방적인 감축이 아니라 공동체가 나눠 감당하는 대상이 되어야 하고 위험은 사회화 되어야 한다는 점에 우리 사회가 합의를 이뤄야 한다.

사실 이것은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우리 사회가 도달한 결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바뀌었는가”라는 자조적 질문을 목전에 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일한 결론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이 또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와 언론이 바로 지금 행동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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