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성남공항을 떠난 대한민국 공군1호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택싱을 마친 공군1호기 문이 열리고 문재인 내외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보다 조금 전 평양공항 터미널의 닫혔던 문이 스르르 열리며 이제는 우리에게도 익숙하고 심지어 친숙하기까지 한 김정은 위원장 내외가 등장했고, 북한주민들의 열광 속에 담담히 공군1호기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남북 정상은 그렇게 다섯 달 만에 벌써 세 번째 만남을 가졌다. 반가운 악수와 뜨거운 포옹도 곁들여졌다. 어떻게 보면 참 쉬워 보일 정도로 자주 만나고 있다. 그렇다고 정말 쉽겠는가. 기나긴 분단역사 속에 남북 정상이 만난 것은 이번으로 겨우 다섯 번이다. 그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세 번을 더했다. 더군다나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2018남북정상회담평양'의 첫날인 18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환영나온 평양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평양공항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 환영식이 끝난 후 화제가 된 일들이 있다. 우선 문재인 대통령이 도착하기 30여분 전부터 생중계된 화면을 통해 드러난 평양 순안공항의 풍경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환영 현수막이었다. 북한 특유의 붉은 배색에 노란 글자가 아니었다. 푸른 바탕에 흰 글씨로 ‘문재인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고 써 있다.

푸른색이 문재인 대통령의 상징색이라는 점에서 북한 측의 세심한 배려가 읽히는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언론들도 주목하지 못한 또 다른 디테일도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을 영접한 공항은 평양공항의 국내선 터미널에도 남북관계에 대한 의지와 배려가 숨겨져 있었다.

평양공항에는 두 개의 터미널이 있다. 그중 국제선 터미널은 김정은의 지적으로 다시 지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국내선 터미널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굳이 국내선 터미널을 사용한 것에서 대한민국을 외국으로 보지 않겠다는 애틋한 의지가 담긴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문재인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8일 오후 정상회담을 가진 평양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 내부. 노동당 본부청사 건물내부가 남측 언론에 공개된 건 이날이 처음이다. Ⓒ연합뉴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두 정상의 첫 번째 회담 장소였던 노동당 청사 로비였다. 하도 자주 봐서 그러려니 했겠지만 조선노동당 청사는 북한 권력의 상징이다. 그곳에 인공기가 아닌 한반도 모형을 설치한 것은 보통의 파격이 아니다. 평소에도 그랬을 리는 없다. 이번 정상회담을 위한 특별한 준비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북한이 준비한 세심한 디테일을 모두 이겨버린 것은 공항에 환영 나온 평양시민들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 문재인 대통령의 진심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2차 회담 때 밥 한 끼 대접하지 못해 늘 마음에 걸려 이날을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말처럼 북한이 평양회담을 정말 정성껏 준비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번 3차 남북정상회담은 다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무겁다. 처음에는 만남 그 자체로도 충분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야당과 언론이 이번 회담에 성과를 압박하고 있다. 그렇지만 평양회담은 그 자체로 결론일 수 없다. 남북 간의 합의는 최종적으로 미국이 움직여야 그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국내적으로 난제들에 둘러싸인 트럼프 대통령이 예전과 달리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평양 방문 이틀째인 19일 오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남북정상회담 메인프레스센터 대형모니터에 9월 평양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모습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다시 말해서 북한이 지금까지 보인 비핵화 조치 수준으로는 미국을 움직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으로서도 미국이 선명한 카드를 내놓지 않은 상황에서, 다 내놓고 기다리겠다는 식으로 대처하기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처럼 북미 간의 딜레마를 풀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흔들려 "되돌아가가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만이라도 신뢰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남북정상은 9월 평양공동선언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간 쌓인 신뢰와 의지의 결과물일 것이다.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한반도"를 김 위원장이 천명했고, 문재인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 참여하에 영구 폐쇄"를 확인했다. 우려와는 달리 상당히 진전된 비핵화 로드맵을 끌어낸 것이다.

여전히 미국의 상응조치가 중요 변수가 될 수밖에는 없지만 9월 평양공동선언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남북의 중단 없는 평화 협력의지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올해 안에 북한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2032년 하계올림픽을 남북 공동으로 유치하는 데 협력하기로도 했다. 연내에 남북을 잇는 철도와 도로 착공식을 갖기로 했다. 다시 남북은 큰 한 발짝을 나아갔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역사에 없는 역사를 계속 써가고 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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