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도우리 객원기자] 여초 커뮤니티 워마드에서 가톨릭이 여성을 억압한다며 성물인 성체를 모욕하고 훼손한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교계는 즉각 이를 규탄하는 입장문을 냈고,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워마드에 대한 경찰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는 청원이 잇따르고 있다.

한편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이번 성체 모욕에 대해 “가장 절박한 여성 의제인 낙태죄 폐지에서 가톨릭이 너무나 보수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거나 “지금까지 일베의 만행에는 가만히 있다가 왜 워마드만 탓하나”는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워마드의 ‘모욕 방식’과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우선 이번 사건을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명분으로 삼는 것은 옹호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자. 또 신성 모독은 ‘표현의 자유’의 성역이 아니다. 특히 절대자로서의 신의 권위가 현실에 악영향을 끼칠 때 신성은 모독 되어야 한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 성경 무오주의가 전횡을 부릴 때 성경을 불태우는 운동이 그랬다.

워마드 로고

하지만 워마드의 성체 모욕은 신성을 제대로 겨냥하지도, 페미니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텅 빈 모독이다. 스페인에서도 퀴어 예술가 아벨 아즈코나가 성체 242개로 단어 ‘PEDERASTY(남색)’를 형상화한 퍼포먼스를 벌인 사례가 있다. 이 퍼포먼스는 성물을 전유해 교계 내 성폭력을 적절히 겨냥했다. 하지만 워마드 회원이 성체에 적은 것이 겨냥하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워마드의 성체 모욕은 ‘휴밀리테인먼트(humilitainment)’의 일종이다. 휴밀리테인먼트란 모욕(humiliate)과 오락(entertainment)의 합성어로, 연예인이 망신당하는 것을 재미 요소로 만든 TV 프로그램을 뜻하는 용어다. 그리고 워마드의 ‘휴밀리테인먼트’는 일시적인 희화화를 넘어 상대의 일부 특징을 싸잡아 깎아내리는 ‘조롱’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해 ‘젠신병자’나 기혼자에 대해 ‘OOO’라는 멸칭을 붙인 것이 대표적이다. 또 ‘엔터테인먼트’인 만큼 조롱 자체를 즐기고 겨루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워마드의 ‘휴밀리테인먼트’는 일베의 ‘혐오 놀이’를 닮았다. 하지만 워마드의 ‘휴밀리테인먼트’는 미러링(mirroring)의 일환으로, 사회의 고질적인 여성 혐오를 비춘다는 점에서 일베와 다르다. 그래서 워마드의 조롱은 ‘사이다’처럼 통쾌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워마드의 ‘휴밀리테인먼트’는 거울상이라기보다 난반사로 사람들의 시야를 흐리고 있다. 워마드에서 불법 촬영의 피해자였던 ‘홍대 크로키 모델’의 전화번호는 물론 그 자녀의 사진까지 올려 희롱하는 게시물이 대표적이다. 정확한 대상을 비추기보다 ‘그저 남성’이면, ‘그저 남성과 연관돼 있으면’ 무조건 저열한 모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물론 부당한 일에 마냥 ‘우아한’ 태도로 일관할 수 없다. 필요하다면 설치고, 분노하고, 떠들어 상대의 ‘두려움’을 유발해야 한다. 토플리스 시위로 유명한 국제 페미니즘 운동 단체 페멘(Femen)이 가톨릭에 저항한 방식이 좋은 사례다. 페멘은 추기경이 스페인 정부의 낙태 제한법을 찬성한 것을 규탄하며 피 묻은 팬티를 주교에 던지며 “낙태는 신성하다”고 외치거나, 성탄절 인파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신은 여성이다”고 선언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처럼 상대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방식이 조롱일 필요는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한 촛불집회도 방식은 평화적이었으나 시민들의 공통 정의감을 무기로 삼은 ‘근본적인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워마드의 ‘조롱을 위한 조롱’ 방식은 일시적이며 피상적인 두려움만을 자극한다.

‘휴밀리테인먼트’에 힘을 실어서는 안 된다. 언론과 안티페미는 워마드를 남성 혐오라고 호들갑 떨지 마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 대한 증오는 가능해도 약자를 배제하는 감정으로서 '혐오(misogyny)'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워마드를 악마화할수록 ‘휴밀리테인먼트’를 적극적으로 방영하며 그들이 원하는 관심과 존재감을 얻게 한다. 또 <복수의 심리학>의 저자 스티븐 파인먼이 “갱 폭력이 매력을 잃게 하려면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사회가 궁극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했듯, 여성 혐오 현실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워마드에 치명적이다.

페미니즘 진영은 워마드를 ‘일베 및 여성 혐오의 반작용’이라며 사안에 따른 선택적 수용이나 미온적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이는 공론장에 “대의만 좋으면 방식은 상관없다”라는 나쁜 신호를 보낸다. 또 모욕의 언어는 ‘절박함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 존중의 언어는 절박하지 않다는 것인가? 그리고 페미니즘 운동이 얻을 평가가 겨우 “일베보다 낫다”인가? 영국의 시인 오든은 ‘정의’에 대해 “우리가 쪼인 것보다 아주 조금 더 세게 남을 쪼아도 된다는 허락”이라고 비꼰 바 있다. 우리의 손에 쥘 정의가 고작 이것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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