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트럼프라고 해야 할까? 한국 사람의 입장에선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일만한 수를 던져 허를 찔렀다. 북미정상회담의 취소를 발표한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모두 이미 ‘칩’을 많이 걸었다는 점에서 이후 상황을 낙관해오던 사람들로서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결과다.

청와대는 일단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진의를 확인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 ‘진의’를 확실히 파악해볼 문제이긴 한 것 같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현지시간 24일 상원 외교위에서 낭독했다는 백악관의 편지 내용과 관계자들의 발언을 보면 그렇다.

눈길이 가는 건 편지의 마지막 단락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마음이 바뀐다면 망설이지 말고 전화나 편지를 주기 바란다”고 한 대목이다. 일단 6월 12일 싱가포르가 아니더라도 정상회담 또는 그에 준하는 어떤 대화의 성사를 위한 협상 자체는 열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미국 언론에 인용된 ‘백악관 관계자’도 마찬가지로 대화 채널이 열려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내놓은 상태다.

물론 이 대목을 들어 트럼프 행정부의 북미정상회담 취소 통보를 마냥 ‘쇼’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화 채널을 열어둔 채로 회담 취소를 발표한 이유가 무엇인지 배후의 맥락을 추론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회담 취소의 배경으로 최선희 외무부 부상의 발언이나 싱가포르 이동 및 수송 준비 미비 등 여러 상황을 나열하고 있지만, 사태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북미 간의 입장 차를 ‘게임’의 관점에서 풀어볼 필요가 있다.

서울역에서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관련 뉴스를 보는 시민들. (연합뉴스)

애초에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을 지체없이 수락한 것은 협상을 ‘이기는 게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이 늘 강조하는대로 북한이 대화의 장으로 나온 것은 그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압박’과 중국이 동참하는 경제 제재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은 완전히 백기를 들고 나온 셈이 되므로 트럼프 행정부는 이후 북한에 얼마든지 자신들이 원하는 액수가 담긴 청구서를 내밀 수 있다.

그런데 판문점 회담 이후 두 가지 변수가 생겼다. 첫째는 북미정상회담의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내 우려는 커졌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과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비관적 관점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과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가 민주 공화 양당이 집권한 행정부 모두에서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 둘째는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특유의 캐릭터 때문에 북한의 비핵화를 충분히 이끌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북미정상회담에서 어떤 합의를 이끌어 내든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민주당에 가까운 과거의 온건론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할 것이고, 공화당의 검증원리주의자들은 우라늄 농축시설이나 어떤 설계도면 등의 은닉 가능성이나 핵무기 개발 관련 인력의 처분 등을 언급하면서 무언가가 불충분하다는 비판을 제기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직면한 두 번째 변수는 중국의 움직임이다. 미국은 중국과 안보와 통상 두 가지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북미대화 국면에 접어들기 이전에도 양국은 상호 간의 ‘관세폭탄’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고 최근에는 미국이 남중국해 문제를 빌미로 중국을 림팩 훈련에서 배제하는 사건도 있었다. 안정적인 경제운용을 중시하는 행정부라면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전략을 선호하겠으나 트럼프 행정부는 오히려 두 문제를 연계한다.

수차례 언급했다시피 중국에게 북핵문제는 지정학적 조건의 변동 가능성을 예고하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미국과의 안보와 통상 문제를 조율할 수 있는 ‘카드’이다. 이런 상황을 익히 알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을 한 사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배후론’ 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북한에 대한 제재 유지 필요성을 강변한 것은 이런 인식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의 변화가 애초 협상의 구도를 허물어뜨렸다.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국내의 비판여론을 납득시킬만한 비핵화 관련 조치를 북한에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됐는데, 그동안 수세에 몰려있던 북한으로서는 오히려 중국을 통한 제재 완화를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는 ‘플랜 B’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한쪽은 이미 카드를 다 보여줬는데 한쪽은 활용할 수 있는 숨겨진 카드가 한 장 더 생긴 게임을 상상해보라.

북한이 남북고위급회담을 무산시킨 일과 이미 일선에서 은퇴한 것으로 알려졌던 북한의 김계관 전 외무성 제1부상이 재등장해 존 볼턴 백악관 NSC보좌관을 겨냥하고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트럼프 행정부에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강경파 분리 시도’로 보았다. 존 볼턴 보좌관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북미대화의 걸림돌로 지목된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강경파들의 입김을 차단할 가능성에 승부를 건 것이다.

‘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이 협상은 미국에 불리하다. 이 구도가 유지되면 미국은 6월까지 북한에 끌려 다녀야 한다. 미국 입장에서 무게균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바로 판을 엎는 것 뿐이다. 판을 엎어버리면 상황은 ‘힘 대 힘’의 국면으로 돌아가고 그러면 여전히 미국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북미대화에서 성과가 도출되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 득이다. 그래서 대화 채널은 계속 열린 상태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그 외 백악관 관계자 등이 내놓은 발언을 종합해보면 다시 북미대화를 정상궤도로 되돌리기 위해선 북한이 대략 두 가지 정도의 조치를 해야 한다. 첫째는 미국이 한국 정부를 포함한 다양한 채널을 통해 요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핵화 관련 조치의 수용이다.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의 반응을 종합하면 그것은 북한의 핵무기 또는 관련 장비 일부를 미국에서 해체하는 정도에 준하는 것일 걸로 추측된다. 두 번째는 최선희 외무성 부상 등을 문책하는 것이다. 백악관 관계자는 “수사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유감을 표할 수는 없다. 결국 최선희 부상이 마음대로 과한 발언을 한 죄를 물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런데 인질 석방과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로 선제적 조치를 취한 북한 입장에선 또 다른 조치를 고려하는 게 쉽지 않다. 따라서 ‘중재자’를 자처하는 남한이 이 과정에 개입해서 양측 입장을 조율하는 역할을 자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도 쉬운 상황이 아니다. 한미정상회담 직후에 이런 사태가 불거짐으로써 오히려 ‘중재자’로서의 역할과 지위는 희미해지는 효과가 생겨나버렸기 때문이다.

각자가 모두 상황 반전을 위해 움직이기 어렵다면 북한의 상투적 대응을 막기 어렵다. 과거 이런 국면에서 북한은 군사적 도발을 선택했다. 북한의 도발은 다시 동아시아의 문제를 북중러 대 한미일이라는 구도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이럴 경우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운전자론’은 힘을 잃게 된다. 그러면 북핵문제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전격적인 타격으로 끝이 나거나 아니면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지금보다 남한에 불리한 방식으로 해결될 것이다.

이런 일은 막아야 하고 그러자면 지금 기회를 최대한 살리는 방법뿐이다. 결국 문재인 정부의 외교 수완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지금까지 풀어왔던 난제보다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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