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민감한 부분부터 얘기하자. 외유성 출장 의혹에 대한 해명이 이 수준에 그친다면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은 그만둬야 한다. 금융회사에 원칙을 들이대는 ‘칼’이 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겉만 요란하고 밀면 밀리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선 곤란하다. 그렇잖아도 금융감독원의 힘은 빠진 상태다. 하나금융지주 김정태 회장이 보란 듯 3연임을 해내고 최흥식 전 원장이 함께 무너지는 것을 보라.

김기식 원장의 거취에 변동이 생긴다면 청와대는 더 ‘저승사자’ 같은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 금융감독원은 무자본특수법인이지만 그동안 원장 자리는 관료 몫이었다. 아마 청와대는 관료 출신이 정권이 추진하는 개혁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본 듯하다. 그런 판단엔 일리가 있다. 하지만 금융권 인사를 ‘민간’ 출신이란 이유로 앉혔다가 낙마하자 또 국회 정무위 소속 국회의원 출신을 데려온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더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채용비리와 지배구조 개선 등의 금융개혁에 대한 청와대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문제제기를 하는 쪽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외유성 출장과 관련한 부분에선 추가 해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비서’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보수세력은 인턴에 불과한 사람이 출장을 함께 다녀온 후 몇 개월 만에 고속승진을 한 것이 수상하다는 둥의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이런 주장은 반쪽만 진실이다.

한국 정치권의 현실에서 의원실 내부 직제 등을 어떻게 운영하느냐는 사실상 의원 재량에 달렸다. 의원실마다 운영방식이 다르다. 직제상 ‘인턴’이지만 다른 비서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면서 “자리가 곧 난다”는 말만 믿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경우도 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아예 의원의 자녀가 인턴으로 돼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현상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이런 현실을 뻔히 알면서 보수세력이 ‘여비서’를 반복 언급하는 것은 누구나 해석할 수 있듯 ‘제2의 안희정’ 프레임을 제기하기 위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듯 명확한 폭로 혹은 당사자의 피해 호소 사실 없이 이런 주장을 공론으로 다루는 것은 비도덕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선거가 눈앞에 닥치지 않았다면 자유한국당 등 일부 야당과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이 이렇게까지 하진 못했을 거다. 그러나 이런 무리수를 감행함으로써 보수적 유권자들이 애용하는 스마트폰 메신저 등을 통해 ‘제2의 안희정’ 프레임이 구전논리로 유포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은 ‘진보의 이중성’이라는 냉소적 현실 인식의 전형으로 공유되었다. 진보라는 사람들은 겉으로 듣기 좋은 명분을 말하면서 뒤로는 온갖 비도덕적 행태를 일삼는 이중적 인물이고 이보다는 차라리 겉과 속이 모두 비도덕적인 ‘일관성’있는 사람이 오히려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보수세력이 ‘여비서’를 반복 호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파괴력을 노린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한 바른미래당 안철수 예비후보가 10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기식 금감원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참여연대’ 프레임도 마찬가지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김기식 원장과 홍일표 청와대 정책실 선임행정관의 관계를 활용해 내놓은 이 프레임에 적극적으로 편승하고 있는 것은 안철수 전 의원이다. 바른미래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안철수 전 의원은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10일 김기식 원장의 해임을 촉구하면서 “박원순 서울시장도 입장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원순 시장이 대표적인 참여연대 출신이라는 것을 상기하도록 한 것이다.

안철수 전 의원은 또 기자회견 전 공개한 발언 내용에서 “참여연대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입니까. 청와대 행사를 기획하는 왕행정관 참여연대, 모든 인사검증을 책임지는 참여연대. 그쪽과 코드가 맞으면 과거에 어떤 일을 저질렀어도 고위직에 앉을 수 있는 겁니까”라고 했는데, 실제 기자회견에서는 해당 내용을 제외한 걸로 보인다. 안철수 전 의원 대신 참여연대를 노골적으로 언급한 것은 같은 당 소속인 유승민 공동대표이다. 김기식 원장이 참여연대 사무총장 시절인 2007년 포스코의 지원을 받아 1년간 해외 연수를 다녀왔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인데 금융감독원은 이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 자료를 냈다.

진보의 이중성이 결국 북한에 대한 태도에까지 이어진다는 연결고리는 자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로 추대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제기했다. 김문수 전 지사는 10일 후보 추대 뒤 첫 행보로 금융감독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금융에 대해 전혀 모르는 시민운동권 출신의 과거 김일성주의자를 금감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해도 너무한 일”이라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김 원장은 참여연대를 비롯해 과거 학생운동도 하던 분”,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시민단체의 핵심 직책에 있으면서 늘 정의와 양심을 얘기한 덕분에 국회의원이 됐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의원보다 더 부도덕한 일을 해왔음을 우리 모두 알게 됐다”고 했다. 앞서 언급한 전형적인 ‘진보의 이중성’ 프레임을 ‘종북’과 연결한 것이다.

결국 종합하면 하나의 맥락 속에서 안철수 전 의원은 박원순 시장 문제를 거론하고 김문수 전 지사는 참여연대와 종북을 말하는 역할분담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바른미래당과 자유한국당으로 양분된 보수의 새로운 전략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른미래당은 중도에 가까운 보수층을 포섭하고 자유한국당은 극우를 단속해서 각자 살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범보수세력이 김기식 원장과 참여연대 인맥 논란, 안희정 전 지사 문제, 북한에 대한 우려를 하나로 연결하고 거기에 부동산, 교육, 주식시장 등 이권과 직결되는 문제들까지 덧붙여지면 이후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진보’가 실제 사람들의 이익에 손해를 끼친다는 관념은 냉소주의로 점철된 오늘날의 담론에서 치명적인 파괴력을 보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10일 지면에 김대중 고문이 작성한 <김문수 안철수의 용단>이란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김대중 고문은 이 글에서 이번 지방선거에 대해“현 집권층이 이기면 좌편향 노선은 일직선으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며 “(보수세력이) 제각각 후보를 냄으로써 서로 망하고 결국은 집권층 도와주는 '좌파 공조 세력'으로 전락하는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 한다”고 했다.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재선에 도전하는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9일 “지금은 선거연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중도보수 통합을 얘기할 때”라면서 “우리당도 잘 개혁해서 보수개혁 중심이 되고 통합을 해가면서 야권과 여권이 정책대결을 하면 희망이 있다”고 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넘어 보수가 거듭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의 핵심이 냉소적 현실 인식을 재생산하고 반사이익만을 기대하는 것이라면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안철수 전 의원과 김문수 전 지사,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등을 주장을 볼 때 보수정치 주요 플레이어들의 의향은 그런 쪽으로 움직여가고 있는 듯 보인다. 이는 보수정치 뿐만이 아니라 한국정치 전반에도 해로운 영향만을 끼칠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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