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앞두고 일어나는 일은 그 본질이 선거와 관련이 없더라도 선거와 관계된 일이 되고야 마는 게 비일비재하다. 김기식 신임 금융감독위원장의 외유성 출장 논란과 ‘외교안보 블랙리스트’ 의혹이 한 점에서 만난다는 것도 이런 사례의 하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발단은 중앙일보의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블랙리스트 의혹 보도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4일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보도라며 정정보도를 요구한 바 있다. 중앙일보는 청와대의 해명을 지면에 싣는 것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예고편이었던 모양이다. 정부가 북한 관련 전문매체 38노스를 운영하는 존스홉킨스 국제대학원(SAIS) 한미연구소(USKI)에 대한 예산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상황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보수언론이 이러한 결정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일제히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9일 조간까지 이어진 일련의 보도와 청와대의 해명을 종합하면 사건의 대략적인 얼개가 드러난다. 청와대는 USKI에 대한 예산 지원 중단이 국회와 대통령 직속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논의에 따른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보수언론은 구체적인 청와대 인사 이름까지 언급하며 청와대 개입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여기서 ‘구체적인 청와대 인사’란 홍일표 청와대 정책실 선임행정관이다. 중앙일보는 9일자 지면에 <강요 권한남용 의심되는 홍일표>란 제목의 전영기 논설위원 글을 실었다. 전영기 논설위원은 이 글에서 홍일표 행정관의 개입을 기정사실화 하고 이를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등 사건에 빗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에 김기식 신임 금융감독원장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김기식 원장은 국회의원 시절 정무위 소속으로 피감기관이 비용을 부담하는 출장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기식 원장은 모든 출장 일정에 공적 목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부적절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논란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다.

김기식 원장이 소화했다는 출장 일정 중에는 2015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예산으로 미국 유럽 등을 9박 10일간 다녀온 것도 포함된다. 동아일보는 이 일정 중에 김기식 원장이 USKI를 방문해 구재회 소장 임기 등의 문제를 직접 거론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9일자 기사에서 김기식 원장의 행보에 대해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실세들과 친분이 있던 구 소장을 교체하려는 게 가장 큰 목적이라는 시각이 많다”며 “한국계 미국인인 구 소장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입각을 시도했을 정도로 자타공인 보수 성향 인사. 특히 이명박 정부의 실세였던 이재오 전 의원과 막역했다”고 썼다.

결국 ‘코드’가 맞지 않아서 소장 교체를 요구했다는 얘길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두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 첫번째는 문재인 정권이 내세우는 ‘적폐청산’이란 결국 허울 좋은 명분일 뿐 본질은 ‘정치보복’에 다름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최근 조선일보는 관가에 ‘JP(적폐)지수’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면서 정권에 밉보이지 않기 위해 고위공무원들이 다들 몸을 사리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문재인 정권이 앞뒤를 따지지도 않고 ‘복수’에 몰두하며 시키는 대로 일한 죄 밖에 없는 공무원들을 사실상 탄압하고 있다는 식이다. 보수언론은 이 문제 역시도 같은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코드’가 문제라고 가정할 때, 그 ‘코드’란 과연 무엇이겠냐는 것이다. USKI가 운영하는 38노스는 위성사진을 해석해 북한의 상황을 파악한 자료를 언론에 제공해왔다. 북한 입장에선 껄끄러울 수 있는 일이다. 북한은 이 때문에 중요한 활동을 할 때는 가림막을 설치하는 등 예민한 반응을 보여온 바 있다. 이 프레임 안에서 보자면 결국 보수언론이 꺼내고 싶은 말은 문재인 정권이 북한의 입장을 헤아린 바도 작용한 게 아니겠냐는 거다.

물론 이 문제를 대놓고 ‘종북’으로 묶는 것은 무리수일 것이다. 다만 좀 더 세련된 버전의 프레임을 제시할 수는 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 기사에서 김기식 원장과 앞서 언급된 홍일표 행정관을 묶는 정치적 고리를 제시했다. 앞서의 홍일표 행정관이 1999년부터 참여연대에서 활동했고 김기식 원장의 국회 보좌관과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및 연구소장 등을 맡은 이력의 인사라는 것이다. 김기식 원장은 잘 알려져있듯 대표적인 참여연대 출신 인사이다. 이렇게 보면 부적절한 외유성 갑질(?) 출장과 외교안보 블랙리스트가 바로 ‘참여연대’라는 지점에서 비로소 만나게 된 셈이다.

3일 오후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서울 마포구 서울 창업허브 별관에서 열린 '서울 핀테크 랩' 개관식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서 자연스럽게 서울시장 선거를 떠올리게 된다. 박원순 서울시장 역시 대표적인 참여연대 출신 인사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김기식 원장은 취임 후 첫 외부 공식일정으로 서울창업허브에서 열린 ‘서울 핀테크 랩’ 개관식에 참석해 박원순 시장과의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언론은 이를 “이례적인 행보”로 보도했다. 이 대목은 재벌 금융회사들에 비판적 입장을 가진 김기식 원장의 성향과 맞물려 현 정부의 ‘좌편향’이 다시 한 번 부각된 사례처럼 회자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보수적 성향의 네티즌들은 홍일표 행정관이 지난 2016년 11월 프레시안과 한 인터뷰에 주목하고 있다. 이 인터뷰에서 홍일표 행정관이 김기식 원장을 “참여연대에서 일할 때 처음 맞은 직속상관”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위의 사무처장이 박원순 서울시장이고 정책위원장이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재선 출마가 유력한 상황이다. 결국 보수세력이 ‘참여연대 프레임’에 서울시장과 서울시교육감 선거를 욱여넣고 일종의 색깔론을 꺼내들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선거판에서 이런 식의 억지가 횡행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당하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꼼수에는 정공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여기서 정공법이란 ‘명분’으로 하는 싸움을 말한다. 정치를 똥 묻은 개들 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노선과 노선의 대결로 다시 돌려 놓아야 한다.

김기식 원장을 타깃으로 한 공격에는 재벌 금융회사를 비롯한 금융권의 ‘암수’가 숨어 있다고 보는 시각도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당국이 김기식 원장 문제와 별개로 금융권의 채용비리나 지배구조 문제 등에 대한 변치않는 개혁 의지를 재확인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최근 삼성증권의 유령주식 사태 같은 대목에서도 원칙적이고 단호한 대응을 보여줘야 한다.

아울러 김기식 원장의 외유성 해외 출장 의혹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한다. “피감기관의 로비였다 할지라도 실패한 로비가 됐다”는 식의 해명은 또 다른 논란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중앙일보는 9일자 지면에 김기식 원장의 유럽 출장 이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요구한 유럽사무소 관련 예산이 그 다음해에 ‘유럽 현지 모니터링 사업’이란 명목으로 배정됐다고 보도했다. 이런 식으론 끝이 없다. 김기식 원장 본인이 사건의 전말을 투명하게 밝히고 국민의 판단을 구해야 한다.

USKI 관련 의혹도 양쪽의 주장이 완전히 반대인 만큼 청와대와 정부의 좀 더 명확한 해명이 필요하다.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과 청와대 관계자 등은 USKI가 그간 불성실한 연구활동과 보고 등으로 지속적으로 문제가 돼와 개선안을 제시했지만 수용하지 않아 예산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USKI 측은 오히려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상세한 자료를 첨부한 보고를 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USKI 측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오해나 보고 과정에서 오류의 문제인지를 확인하고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진실게임이 되면 앞에서 서술했듯 의혹이 정파적으로 악용되고 파국에 이르는 길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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