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에 김영철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 한 모양이다. 김영철은 통일전선부장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전선부장은 우리 정부 체계로 보면 국정원과 통일부를 합친 정도의 업무 영역을 담당하는 직위이다. 결국 북한 대남사업의 총책임자를 보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문제로 보면 상황은 좀 복잡해진다. 김영철은 원래 군 출신으로 과거 조선인민군 정찰총국의 총국장을 맡은 바 있다. 이 시기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이 일어났는데, 김영철은 사실상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바 있다. 이후 그때까지 통일전선부장을 맡아 온 김양건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김영철을 중심으로 한 군 강경파가 당료 출신 인사들을 밀어내고 대남라인을 접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김영철 방남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나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직위’를 중심에 놓고 보면 김영철의 방남을 크게 문제 삼기는 어렵다. 청와대가 김영철의 방남을 받아들이기로 한 배경에는 결국 이 ‘직위’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김영철은 주로 강경파의 역할을 맡아왔다고는 하더라도 남북의 협상장에 장기간 등장해 실무를 맡은 이력을 갖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또 김정은이 직접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관계의 개선을 ‘강령적 지시’를 통해 분명히 해놓은 상태에서는 군사적 측면까지 아우르는 대화를 위해서는 김영철과의 접촉이 불가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남북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과정 속에서 피할 수 없게 된 일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남과 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김영철의 방남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도 곤란하다. 꼭 통일전선부장이 직접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에 참석을 해야만 실질적인 논의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런 논란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최룡해 중앙위 부위원장 등으로 대표단 인적구성의 교체 등을 요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천안함 유족들을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는 등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북한이 모르는 것도 아닌데 북한이 굳이 김영철 카드를 고수한 배경을 짚어봐야 한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크게 좋은 의도와 나쁜 의도의 가능성을 각각 논하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군사와 대화 양쪽의 논의를 아우를 수 있는 인사가 직접 방남해 남북정상회담 등의 준비를 빠르게 진행하려는 의도이거나 사실상 북미대화의 가능성이 당분간 희박하다는 것을 고려한 행보라는 것이다.

통일전선부장의 직위상 최근 남북관계의 상당 부분을 막후에서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서훈 국정원장을 카운터 파트너로 한다는 점과 폐회식 이후에도 김영철의 방남 일정이 잡혀있다는 사실은 남북정상회담 등과 관련한 추가 논의를 기대해볼 만한 대목이다. 반면 김영철이 우리 정부와 미국의 대북제재리스트에 올라있는 인물이고 북한의 대남도발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인사라는 점은 북미대화를 위한 접촉에 있어서의 장애요소로 볼 수 있다.

정부도 김영철 방남이 북미접촉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 것 같다. 청와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인 이방카 트럼프가 포함된 미국 대표단과 북한 대표단의 접촉 등은 예정된 바 없으며 청와대도 이를 중재할 계획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북한 대표단이 미국 대표단에 포함된 인사와 비공식적인 접촉을 가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김여정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간 만남이 무산된 사례를 보면 이런 경우에도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가기는 어려운 상황인 걸로 보인다. 다만 이방카나 김영철 양쪽 모두 문재인 대통령과 만찬 회동이나 접견 일정을 예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정부를 통한 간접적인 의사 교환 정도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언론은 특히 미국 대표단에 포함된 앨리슨 후커 NSC 한반도 보좌관의 존재에 주목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와 소속 의원들이 23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북한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단장으로 한 고위급 대표단의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 참석을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어쨌든 이대로 두면 우리 정부가 북미대화를 중재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구상은 당분간 실현이 어려워질 수 있다. 따라서 이 동력을 유지하고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논의를 북한 대표단과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예를 들어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여건’이란 결국 북미대화를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조건 형성이라는 게 다수 해석이다. 미국은 북미대화를 위해선 북한이 최소한의 성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을 상대로 비핵화 논의에 나설 것을 촉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북한으로서는 ‘압박’으로 받아들일만한 일인데, 특히 김여정이 포함된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펜스 부통령과의 만남을 한 차례 거부한 일이 있는 만큼 이는 불가피한 일로 보인다. 북한이 기존 태도를 바꿔 비핵화 논의에 대해 전향적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성과를 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역시 분명하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국면을 낙관할 수 없게 만든다. 북미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남북관계의 급진전은 이뤄질 수 없고, 남북관계의 개선 없이는 북미대화의 모멘텀이 만들어지지 않는 악순환이 형성된 것처럼 돼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한미군사훈련 재개 문제까지 겹치면 고차방정식의 풀이가 쉽지 않다.

다만 주목해볼만한 대목은 의외의 부분에서 북미대화의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북한이 억류하고 있는 미국 시민 3명을 석방하면서 미국의 무게감 있는 인사를 불러들이는 방안 등이 현실화되는 시나리오다. 중앙일보는 이 시나리오에서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방북하는 경우 등을 가정한 바 있는데,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 같지만 남-북-미 간 관계개선 논의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가져볼만한 얘기일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서라도 진전이 있어야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 구상에도 힘이 실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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