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추석 시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웃기거나 아니면 화끈하게 때려 부수거나 아니면 웃기고 때려 부수는 영화가 각광을 받아왔다. 물론 예외도 있긴 하다. 2010년 '시라노 연애조작단' 과 같은 웰메이드 로맨스 영화가 추석극장가를 석권한 적도 있었고, 올해 추석 극장가에서 관객들의 눈물샘을 공략하는 데 성공한 영화 '아이캔 스피크'도 추석극장가 흥행 공식에는 다소 비껴난 장르라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 모두 김현석 감독이 연출하였다.

또한 2010년대 들어서는 '광해', '사도', '밀정' 등과 같은 웰메이드 시대극들이 추석 흥행의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하였다. 1980년대 '뽕', '변강쇠', '내시' 등과 같은 토속 에로물들이 단골처럼 추석에 개봉하던 풍경은 상상조차 되지 않을 만큼 관객의 취향도 많이 변화하였다.

영화 <범죄도시> 포스터

유례없는 최장연휴에도 불구하고 올 추석 극장가는 라인업 구색이 그다지 다양하지는 못하였다. 대부분의 한국영화 라인업들이 헐리웃 블록버스터 '킹스맨: 골든서클'과의 맞대결을 피해 개봉일정을 잡았기 때문이다. 사상 유례가 없는 흥행부진을 겪고 있는 헐리웃이지만, 해외에서 여전히 헐리웃산 블록버스터 브랜드파워는 막강하다.

그런데 개봉 전에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영화 한 편이 과감하게(?) '킹스맨'에 맞장을 띄웠다. 바로 '범죄도시'라는 영화. 포스터만 봐서는 완성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당장 케이블 및 동영상 다운로드 시장으로 직행할 것 같은 분위기의 포스터였다. 특히 마동석의 얼굴이 유난히 부각된 포스터는 4년 전 평단과 팬들의 혹평세례를 받은 영화 '살인자'를 연상시키도 했다.

심지어는 어찌하여 이런 영화가 추석 대목을 겨냥하여 개봉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마동석과 윤계상이 함께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살인자' 같은 졸작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게 했다. 하지만 별다른 관심은 가지 않는 영화였고, 그래서 봐야할 목록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영화였다.

그러나 개봉 이후 영화 '범죄도시'는 야금야금 관객 수를 늘려나갔고, 급기야는 개봉관 수도 역주행으로 늘어나는 이변이 벌어졌다. 그리고 개봉 한 지 5일 만에 모처럼 한국영화 흥행기세에 날개를 달아준 영화 '남한산성'마저 제치고 박스오피스 정상에 등극하는 돌풍을 일으키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 '범죄도시'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고, 관람후기를 보니 자발적인 응원의 후기들이 포털 게시판 및 블로그 검색 결과를 장식하고 있었다. 결국 추석연휴가 지난 즈음에 영화 '범죄도시'를 접하게 되었다.

영화 도입부부터 스릴을 느끼게 하는 구성이 돋보였다. 영화의 중심축인 강력계 형사 마석도(마동석)와 조선족 출신의 조직폭력배 보스 장첸(윤계상)의 캐릭터를 대비시키면서 시작하는 오프닝은 머지않아 두 중심축이 충돌할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쫄깃한 긴장감을 심어준다.

영화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계속해서 심장만 쪼아대고 폭력 일변도로 흐르기만 했다면 영화 '범죄도시'의 매력은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마동석이 연기하는 마석도를 비롯해 강력반에 등장하는 형사 캐릭터들은 영화의 웃음을 책임진다. 고달픈 일상 속에서 삶의 여유를 찾으려 애쓰는 캐릭터상은 영화 '다이하드'의 죽도록 고생하지만 유머는 끝까지 고수하는 멋쟁이 형사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을 연상시켜 더 친근감을 안겨줬다.

그리고 2년 전 개봉했던 영화 '베테랑'에 등장했던 강력반 형사들의 캐릭터도 연상시켜서 별 부담 없이 그들의 캐릭터에 녹아들 수 있었다. 형사 캐릭터에 대비되는 장첸 일당은 심각한 분위기의 배경음악과 더불어 극악무도한 잔혹함을 드러내면서 영화의 긴장감을 높여준다.

영화 '범죄도시'는 긴장감이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적절한 호흡을 유지한다. 그런 구성을 가능하게 한 주역은 단연 마동석의 캐릭터가 발산하는 매력이다. 남들과는 차별화된 몸과 파워로 범죄들을 휘어잡는 강렬함에 중간중간 빵 터지는 웃음을 제공하는 그의 매력은 영화의 재미를 배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곳곳에 위트 넘치는 대사들이 영화에 양념을 더한다. 모델과 소개팅을 해서 어땠냐는 질문에 정색하면서 '손모델'과 소개팅 했다고 마석도가 대답하는 장면이나, 말 안 드는 범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진실의 방 등과 같은 장치, 그리고 변호사를 요구하는 조선족 깡패 피의자에게 전기충격기를 들이대면서 '전변호사'라고 일컫는 장면 등은 관객들에게 쫄깃한 웃음을 선사한다.

풍채로 상당한 위압감을 전달하지만 범인들을 대할 때는 심드렁하면서 깨알 같은 재치와 유머를 던지는 마석도 캐릭터는 한국 액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한 발견이었다.

영화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버리는 캐릭터 없이 영화 곳곳에 적절하게 활용하고 스토리에 탄력을 불어넣는 부분이다. 특히나 조선족 출신 조직폭력배로 등장하는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는 극에 리얼리티를 살려준다. 단순한 듯하지만 캐릭터들을 적절히 살리고 활용하는 구성이 영화 '범죄도시'가 선사하는 매력이다. 자신의 필모그래피 사상 처음으로 잔혹한 악역을 연기한 윤계상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악랄한 조선족 폭력배 장첸을 소화해냈다.

주연을 맡은 마동석은 캐릭터의 매력을 극 중에서 보여주는 사이더 같은 매력만큼이나 시원하게 잘 뽑아냈다. 1990년대 많은 팬들을 열광시켰던 스티븐 시걸을 연상하는 사이더 액션에 특유의 위트와 유머를 겸비한 마동석의 매력은 더욱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생각보다 덜(?) 잔인한 것도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형사물로서 액션장면 또한 손색없으면서 동시에 관객들에게 웃음도 적절하게 제공하는 영화 '범죄도시'는 잘 만든 콘텐츠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준다. 개봉 초기 상영관도 제대로 못 잡고 흥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포스터로 인해 영화가 가진 매력을 제대로 전달도 못했지만, 결국 관객들의 입소문은 거대 상영관들이 잘되는 영화에 스크린을 이른바 '몰빵'해주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범죄도시'가 아쉽게 묻히는 일이 없게끔 흥행을 주도하였다.

198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의 돌풍을 몰고 온 '영웅본색'도 정작 1편 개봉 당시에는 극장에서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동네 비디오 가게를 통해 '영웅본색'은 폭발적 입소문을 탔고 급기야는 이듬해 개봉한 2편의 흥행 촉매제가 되었다. '범죄도시' 또한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급속도로 입소문을 타게 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1980년 대 당시와 입소문의 근원지와 수단만 다를 뿐, 결국 잘 만든 영화는 반드시 관심을 받게 된다는 확신을 심어준 영화 '범죄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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