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을 바탕으로 하여 어린이를 위해 쓴 산문문학의 한 갈래', 이 정의의 문학이 바로 '동화'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동심이란 무엇인가? 생뚱맞지만, 일본의 애니메이션 <짱구>를 예를 들어보겠다. 한창 아이들을 키우던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 애니메이션 <짱구>를 못 보게 하기 위해 실랑이를 벌인 기억을 가진 부모들이 있을 터이다. 매번 못 보게 하는데 어린이 채널만 틀면 자주 나올 뿐더러, 아이들이 참 좋아했다. 어른들이 보기엔 종종 선정적(?)이기까지 한 그 내용을 아이들은 재밌어 했다. 이런 식이다. 어른들이 자라던 시절 즐겨보던 백설공주니 신데렐라를 이제는 좋은 동화라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용어까지 생겨날 지경이다.

가치 판단을 제쳐두고,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를 되새겨 보면 굳이 '잔혹동화'란 범주를 따로 둘 필요가 없을 만큼 적나라했다. 왕비는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 의붓딸을 죽이려 했고, 심지어 요리를 해서 먹고자 했다. 그런 왕비에게 주어진 벌은 뜨겁게 달군 무쇠 신을 신고 죽을 때까지 춤을 주는 것이었으니, 요즘 웬만한 형벌 저리 가라다. 자신의 저주 걸린 발을 스스로 자른 '분홍 신을 신은 소녀'는 어떻고. 그 반대도 있다. 착하게 잘 지내니 굴러 들어온 호박이 황금 마차로 변하기도 한다. 아니 왕자와 결혼을 꿈꾸던 바다 속 공주는 허망하게 물방울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예전 사람들이 요즘의 사람들에 비해 '속물'이라서 저런 동화가 오래도록 회자되었던 것일까? 오늘날 출판물의 형태로 정화된 동화보다 훨씬 잔혹했던 원형질의 동화가 오래도록 '스테디셀러'였던 의미는, 어쩌면 가장 본원적인 '인간의 욕망과 그 가감 없는 구현의 결과물을 적나라하게 반영'해 주었다는 데 있지 않았을까?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를 부정하는 어른들은 정작 여전히 TV를 통해 변종된 동화의 형태로 이 시대의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드라마들에 매료된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인기작가 김은숙의 드라마는 바로 저 '동화적 욕망'의 가장 충실한 구현이 아닐까? 바로 그 가장 솔직한 인간의 원형을 통해 '성장의 치유제'가 된 이 시대의 동화 한 편이 찾아왔다. 바로 <몬스터 콜>이다.

몬스터가 들려 준 동화

영화 <몬스터 콜> 스틸 이미지

말기 암에 걸린 엄마와 사는 소년 코너. 그에게 학교는 '폭력'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하루 일과가 끝나는 곳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밤, 그의 방에서 바라보이던 언덕 위의 느릅나무가 '몬스터'가 되어 찾아왔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형색과 다르게 그에게 동화를 들려주겠다는 몬스터. 하지만 그냥은 아니다. 언제나 동화 속 '이종의 존재'들이 그러하듯 몬스터는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맞추라거나, 혹은 비밀의 보화 대신 소년이 만든 동화를 요구한다.

몬스터가 들려준 첫 번째 동화. 우리가 어디서 한번쯤은 들었을 법한 계모 왕비와 왕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이와 도망을 친 왕자는 그녀를 잃고,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마녀 왕비를 물리치고 왕국의 계승자가 되었단다. 그런데, 동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치 100년의 잠에서 깨어난 숲 속의 공주가 뜻밖의 식성을 보이듯, 왕좌를 차지하고 훌륭한 성군이 된 왕자의 뒷담화에는 뜻밖의 진실이 숨어 있다. 두 번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신실한 목사와 그를 시험에 빠뜨리는 마법사 같은 약사의 이야기 역시 숨겨진 진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언제 성장할까?

영화 <몬스터 콜> 스틸 이미지

어릴 적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들은 '흥부'처럼 착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머리가 좀 더 커지고 단단해지는 그 언젠가부터 흥부가 좀 '바보'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식이다. 어린 시절 전달된 이야기의 교훈들을 곧이곧대로 수용하던 ‘소극적 수용자'들은 조금 커지자 그 이야기를 '시시'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몬스터'의 힘을 빌려 사고를 친 코너는 한결 같이 어른들에게 묻는다. 저에게 벌을 주지 않나요? 저를 야단치지 않아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큰 '복선'이 될 대사이다.

어른들은 코너를 그저 엄마가 아픈 불쌍한 아이로만 '대상화'시킨다. 하지만, 정작 몬스터에 의해 결국 드러난 코너의 속내는 그보다 복잡하다. 왕국을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 왕자나, 한밤중 약사를 찾아간 목사처럼. 그리고 그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증거이다. 어른들이 생각하듯 코너는 그저 엄마를 잃는 것만을 생각하는 단순한 아이만이 아닌 경계선에 서있었던 것이다.

영화 <몬스터 콜> 스틸 이미지

몬스터의 동화는 그래서 마치 옷의 겉감과 안감처럼 두 개의 전혀 다른 질감의 속살을 가진다. 세상에 알려지는 이야기와 미처 드러낼 수 없었던 속사정이라는, 그리고 코너는 그 이면의 속살을 가진 이야기들을 발판 삼아 폭력으로밖에 표출할 수 없었던 자신을 들여다 볼 용기를 얻는다. 그 용기의 관건은 가장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진솔한 모습은 비겁하고 때로는 용렬하며, 심지어 도덕이라는 잣대에서는 한참 비켜 선, 날것 그대로의 인간이다.

소년은 질타하지만, 몬스터는 그가 들려준 동화 속 주인공 그 누구도 힐난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속사정을 지니고 살아가는 게 인간이라는 듯. 마치 조금은 머리 커져버린 우리가 '놀부전'을 탐닉하게 되듯이 말이다. 소년은 무시하지만 어느덧 스스로 용기를 내어 자신이 외면했던 악몽을 직시한다. 그리고 그 악몽 속에 숨겨진, 용납할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어쩌면 소년에게 '몬스터'는 자기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몬스터 콜>은 꼬리에 꼬리를 문 '동화'이다. 소년 앞에 나타난 몬스터, 그 설정 자체가 동화적이지만 한 술 더 떠서 몬스터는 나타나서 '동화'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 동화 속에는 또 다른 잔혹동화가 숨겨져 있고, 그 동화와 잔혹동화의 과정은 일그러진 욕망으로 표출된 소년의 해프닝과 궤를 같이 한다. 누군가에게 맞는 걸 넘어 스스로 '파괴자'가 되어가던 소년의 파국을 몬스터와 동화는 욕망의 배출이자 정화의 동화가 되어 소년을 이끈다. 할머니가 꽁꽁 잠가놓았던 엄마의 방에서 만난 스케치들, 그리고 마지막 엄마와 눈을 맞추던 몬스터까지. 영화는 충실하게 또 한편의 동화를 마무리한다.

영화 <몬스터 콜> 스틸 이미지

그리고 그 우여곡절의 동화를 통해, 그저 엄마와의 이별이 싫고 엄마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던 소년은 이제 엄마를 보낼 수 있게 '성장'한다. 그렇게 거대한 성장의 담론은 ‘소년은 슬프지만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답니다’라는 성숙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몬스터'라니 정말 괴물영화인 줄 알고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러 온 부모들은 내내 칭얼거리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코너라는 소년의 이야기지만, 오히려 영화는 아직도 TV 속 동화에 위로를 얻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몬스터 동화이다. 자신을 다져넣고 욕망을 거세하며 사는 것이 어른이라 여기며 사는 이 시대의 '어른이'들에게, 솔직담론으로서 <몬스터 콜>은 결국 눈시울이 붉어질 수밖에 없는 어른을 위한 찐한 동화 한 편으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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